콘텐츠를 보는 형태가 크게 바뀌고 있다. 드라마를 2배속 3배속으로 빠르게 보고, 2시간짜리 영화가 지겨워 10분짜리 요약본으로 본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리퀴드(Liquid, 액체 혹은 유동적인)’라는 레토릭을 빌린다면, 이런 문화 현상은 ‘리퀴드 향유’로 표현할 수 있다. 영화, 드라마, 만화 등 콘텐츠의 디지털 전환이 보편화되고, 콘텐츠를 전하는 채널이 무한히 확장되며 단순히 보는 방식을 넘어 콘텐츠의 성질 자체까지 바뀌고 있다. “영화를 2배속으로 본다고? 그렇게 봐서는 안 돼. 느긋이 감상해야지.” 비판만 하고 있다면, 잠시 멈추고 이런 변화의 속살을 들여다보자.
시리즈 콘텐츠의 몰아보기 트렌드를 가져온 OTT (출처 : 넷플릭스 홈페이지)
최근 이러한 변화는 OTT 서비스의 보편화로 가시화되었는데, 무엇보다 시공간적 제약을 넘어서 향유자의 취향과 자율성이 적극 반영된 결과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는 1) 콘텐츠를 원하는 속도로 빨리 감기로 보거나 건너뛰기로 본다 거나, 2) 단순한 몰아보기 수준을 넘어서 원하는 만큼 원하는 방식으로 즐기는 ‘빈지워칭(binge watching)’이 세분화되거나,
3) 보고 싶은 것만 볼 수 있도록 하는 ‘취향의 알고리즘’이 고도화되거나, 4) 짧은 시간에 내용 파악이 가능하도록 축약해서 편집한 ‘패스트 무비(fast movie)’가 일반화되거나, 5) 팬덤 기반의 향유가 확산되면서 ‘체험의 위계화’(hierarchy of experiences)를 자극하는 전략이 일반화된 것 등을 들 수 있다.
1시간짜리 예능을 보는 10가지 방법
이러한 사례들의 공통점은 기존의 콘텐츠 향유 방식을 거부한다는 점과 콘텐츠의 향유 단위를 유연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영화나 드라마 혹은 예능 프로그램 등의 향유 단위는 상영/방송시간과 일치했다. 1시간짜리 드라마는 ‘당연히’ 1시간 동안 시청했다. 그러나 최근엔 플랫폼이나 채널의 특성에 따라 최적화된 향유 형태가 달라지고 있다.
십분 내외의 영상 클립을 제공하는 JTBC 싱어게인 공식 유튜브 채널(출처 : JTBC 뮤직 유튜브 채널)
요즘 화제인 <싱어게인3>의 경우 방송시간은 120분 정도인데 향유자들이 유튜브 등을 통해 출연자별로 즐기는 클립(짧은 영상)은 8-10분 내외로 매우 유연하다. “나 그 방송 봤어!”라고 할 때 120분이 아닌 8분짜리 클립을 봤을 가능성도 높다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이를 방송을 안 봤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방송으로 보는 120분이 이 프로그램의 향유단위인 것처럼, JTBC가 오피셜 클립으로 유튜브를 통해 제공하는 8-10분 단위의 클립 역시 인정해야 할 향유 단위다.
더구나 레거시 미디어가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며 일방적인 분량, 속도, 선형적 전개 등의 향유 방식을 거부하고, 각 플랫폼의 사용자 환경(user interface)에 따라 0.5에서 2배속까지 다양한 속도로 콘텐츠를 즐긴다거나, 건너뛰기, 빨기감기, 반복해서 보기,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방식의 향유가 보편화되었다는 점은 반드시 주목해야 할 지점이다.
일본 칼럼니스트 이나다 도요시(稻田 豊史)의 저서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은이러한 현상을 ‘감상에서 소비’로의 변화라고 규정한다. 책에선 외적 요인으로 콘텐츠 공급량의 증가, 작품의 과잉 설명이 보편화된다는 점을 꼽았다. 볼 게 많아졌다는 것은 알겠고 ‘작품의 과잉 설명’은 무엇일까? 과거에 영화나 소설 등 많은 콘텐츠가 주제나 내용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을 아꼈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하며 음미할 수 있는 여백의 공간을 넣었다. 하지만 시간의 가성비를 따지는 시대에는 스토리는 선명하게, 대사나 자막으로 상황을 다시 한번 소개하는 콘텐츠들이 대세가 되었다.
여기에 더해 타인과의 소통을 위한 공감이 강제되는 상황, 즉 “너 그거 봤어?”라는 질문에 “응 재밌었서!”라고 답해야 하는 상황에서 시간의 가성비가 더욱 중요해졌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자신의 방식대로 즐기겠다는 쾌락주의의 전면화를 꼽았다. 즉 지금의 ‘리퀴드 향유’는 보고 싶은 작품보다 보아야만 할 작품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시간의 가성비까지 고려한 향유자의 전략적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시청자의 자유를 높이도록 진화하는 미디어
이러한 현상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다. 콘텐츠의 원형을 훼손시키는 B급 시도이고, 콘텐츠의 질적 하락을 불러오는 기형적 향유라고 폄훼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시각에서 보면 이것은 새로운 향유 방식의 확대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콘텐츠는 향유자의 요구를 능동적으로 반영하고 취향을 세분화함으로써 향유자의 자유를 높이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쉬운 예로 국내외를 불문하고 TV를 외면하는 이유는 시청자의 자율권, 능동적 개입, 커스터마이징(Customizing)이 시스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그 변화가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완전한 바뀌어 버린 콘텐츠 향유 문화를 우리가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가 더 중요하다.
바뀐 시청자 트렌드, 미디어 전략에 반영해야
콘텐츠 소비의 트렌드는 이미 바뀌었다. 빅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취향의 알고리즘이 현실화되었고, 콘텐츠의 성패는 이제 오로지 시청자의 요구에 따라 좌우되게 되었다. 과거와 달리 취향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강력한 팬덤이 콘텐츠 리뷰 등 2차 창작물의 생산을 담당하게 된 경향도 소비자들에게 더욱 힘을 실어준다.
아울러 콘텐츠 내적으로도 변화가 있다. 콘텐츠 속 갈등은 연성화되거나 아니면 아예 극렬해지고 있다. 서사의 전개 속도 역시 폭주하거나 늘려지는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진다. 긴 호흡의 의미를 추구하기 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나 조건에 최적화된 콘텐츠를 탐닉한다.
콘텐츠를 소비하는 시청자들의 모습은 일견 모순적이다. 점점 최단 시간, 최소 노력으로 이 순간을 즐기려는 반면, 긴 시간을 들여 시리즈물을 소비하기도 하는 시청자. 개개인의 취향에 맞춘 커스텀을 즐기는 동시에 사람들 대다수가 좋아하는 대세 콘텐츠 역시 추구하는 시청자. 시청 트렌드의 원인 분석과 함께 이에 대한 기민한 대응이 함께 실천되어야 할 시간이다.
박기수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문화콘텐츠연구소 소장으로 국제문화대학 학장을 역임한 바 있다. 문화콘텐츠 스토리텔링 전문가로서 실천중심의 연구에 힘쓰고 있다. 문화콘텐츠 스토리텔링과 함께 문화콘텐츠 향유 전략 및 팬덤,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 등을 중심으로 산학연계를 통한 실천적인 학문의 구축에 주력하고 있다. 《애니메이션 서사구조와 전략》, 《アニメは 越境する》, 《문화콘텐츠 스토리텔링 구조와 전략》, 《윤태호》, 《강도하》, 《박흥용》, 《웹툰,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의 구조와 가능성》,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 스토리텔링 전략》 등 30권의 저서와 80여편의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