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업스토어와 오일장
“그만 거둘까?”
“잘 생각했네. 봉평장에서 한 번이나 흐뭇하게 사본 일 있을까. 내일 대화장에서나 한몫 벌어야겠네.”
(......) 절렁절렁 소리를 내며 조선달이 그날 산 돈을 따지는 것을 보고 허생원은 말뚝에서 넓은 휘장을 걷고 벌여놓았던 물건을 거두기 시작하였다. 무명 필과 주단바리가 두 고리짝에 꼭 찼다. 멍석 위에는 천 조각이 어수선하게 남았다.
이효석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한 장면이다. 이 소설은 강원도 봉평의 오일장에서 물건을 팔던 장돌뱅이 허생원과 동이의 이야기다. 근대적인 상설 시장이 생기기 전에도 사람들은 물건을 사고팔거나 맞교환을 했다. 직접 생산한 물건들을 가지고 나오는 동네 사람도 있었고, 이들처럼 물건을 이고 지고 다니며 판매하는 보부상도 있었다. 이제는 전통 시장이 된 오일장. 요즘에도 장이 서는 곳이 있다. 장 서는 날은 살짝 동네 축제가 열리는 것 같기도 한데, 아이들과 함께 체험 삼아 방문하는 가족들도 눈에 띈다.
강원도 봉평장 / 출처: 한국관광공사 홈페이지
갑자기 오일장을 떠올린 건, 팝업스토어(pop-up store)가 한시적으로 펼쳐지는 장시(場市)를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늘 같은 공간에서 같은 물건을 파는 시장이 아니라, 정해진 기간에만 펼쳐놓았다가 거두는 형태의 스토어가 장이 서는 날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했나 보다. 게다가 오일장에서도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 마당놀이 같은 볼거리를 제공했다고 하는데, 팝업스토어야말로 알록달록 볼거리 그 자체이니까. 물론 오일장과 팝업스토어 사이에는 100여 년의 긴 세월이 있지만 말이다.
팝업스토어는 2002년 미국의 한 대형마트에서 신규 매장의 공간을 마련하지 못해 임시로 만든 것이 시작이었다고 한다. 국내에도 10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팝업스토어가 열리고 있다. 사실 오일장과 팝업스토어는 볼거리를 곁들여 한시적으로만 열린다는 공통점 말고는 차이점이 더 많다. 과거에는 물건의 판매와 소비가 지금처럼 빈번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저 사는 데 필요한 것을 구하면 그만이었으니, 매일 열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5일, 10일 등 텀을 두고 한 번씩 펼쳐졌다. 그에 비해 현대의 팝업스토어는 계속해서 새로운 제품들이 출시되는 소비 시장에서 조금 더 특별하게 잠재적 구매자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기동성 있게 열리는 마켓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과거의 오일장은 그저 날 것 그대로의 대면이었다. 사람과 사람이 한 공간에서 한 시간에 만나서 직접 물건을 보고 거래를 하는, 시공간의 동시성이 이루어진 현장이었다. 위의 소설 장면에서처럼 당시 장이 서는 마을에서 다음날 장이 서는 곳까지는 꼬박 하루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고 한다. 오늘 봉평장에서 물건을 팔다가 내일 대화장에서 다시 물건을 펼치는 것이다. 그렇게 걸어가는 길목에 주막이 있었고, 나귀를 타고 가는 장돌뱅이들도 있었을 거라 상상해 본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낯설게 느껴지는 건 그때와 지금의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완전히 달라져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공간의 압축, 그럼에도 편리성을 뛰어넘는 경험들
우리는 온라인 구매 서비스로 인하여 직접 매장을 방문하지 않고 필요한 물건을 고르고 택배 서비스로 받아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 생산된 제품도 개인 소비자가 구매할 수 있다. 교통수단과 이동통신 기술의 놀라운 발달로 인한 이동성- 모빌리티(mobility)의 증가가 가져온 생활의 변화이다. 심지어 언제나 손에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에서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 가히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모두 뛰어넘은 현대인, 우리의 모습이다.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1935- )는 이런 현상을 과거에 자연 그 상태로 펼쳐져 있던 ‘시공간이 압축되었다’고 표현했다.
코로나로 인해 오프라인에서의 활동에 제약이 심했던 시기에 이런 비대면 구매는 그 가치가 더욱 빛났다. 심지어 전 세계적으로 낯선 전염병 때문에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자, 온라인 서비스 기술의 발달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급물살을 탔다.
그러다 코로나 격리가 종료되고 나서 사람들은 그동안 웅크리고 있던 몸을 펴고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다. 한동안 금지되었던 오프라인 공간에서 친한 사람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런 배경과 만나 팝업스토어가 더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친구와 함께 하는 취미생활
20대의 A 씨는 캐릭터 B의 마니아다. 얼마 전 팔로잉하는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B의 팝업스토어가 열린다는 소식을 보고 놓치지 않고 다녀왔다. 평소 같은 캐릭터를 좋아하는 친구 한 명과 종종 만나서 함께 시간 보내길 좋아하는 또 다른 친구, 이렇게 셋이서 주말에 시간을 냈다. 인스타에서 본 사진에서 팝업스토어의 전체적인 색감을 미리 알아서 친구들과 드레스코드를 맞추었다. 사진으로 남겨야 하니까 특별히 메이크업과 헤어에도 신경을 썼다.
팝업스토어에서만 구할 수 있는 한정판 그립톡을 구매했고, 하나씩 모으고 있는 피규어도 샀다. 친구들은 각자의 사정으로 이번에는 구매를 자제한다고 했다. 사람이 좀 많긴 했지만 작정하고 간 것이니, 한 시간도 넘게 사진을 찍고 몇 장 건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사진을 골라 캐릭터 이름과 팝업스토어를 태깅해서 인스타에 올렸다.
더현대서울 힌디 팝업스토어 / 출처: 더현대 서울 인스타그램(@thehyundai_seoul)
라이프스타일과 경험
한편 코로나가 아니어도, 이미 온라인 구매가 활발해지면서 오프라인 매장들은 상대적으로 찾아오는 고객도 줄고 매출도 줄어드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었다. 물건을 사기 위해 꼭 매장으로 나와야 하는 게 아니라면, 오프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은 단순한 구매 행위가 아닌 다른 특별한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팝업스토어는 물건뿐 아니라 고객에게 특별한 경험을 제공하게 된다. 브랜드의 이미지와 가치를 알리기 위함이다.
소품종을 1:1로 교환하던 시장의 시초는 이후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다품종 대량생산의 시대를 거쳐 왔다. 그러다가 지금은 그야말로 소비가 일상이 되었고, 사람들은 실용적인 소비뿐 아니라 상징적인 소비를 하면서 살아간다. 기본적인 의식주 생활을 위한 구매를 넘어서, 스타일을 소비하고 자신의 취향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자신이 구매하는 물건이 곧 자신을 나타내준다고 믿는 물신주의까지는 아니더라도, 스스로 가치를 두는 라이프스타일을 꾸려나가면서 식재료를 고르고, 입는 옷과 쓰는 물건들, 집을 꾸미는 장식들, 심지어 보는 책도 자신의 스타일에 맞게 고른다. 이런 소비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브랜드의 이미지와 가치는 중요하게 와닿는다.
며칠 전 지인의 집에 초대를 받아서 선물을 사기 위해 생활용품 브랜드(무인양품 or MUJI) 매장에 들렀다. 방향제, 디퓨저 등을 판매하는 코너에는 ‘향기’와 관련된 책 두 권을 함께 전시해 두었고, 식료품 코너에는 자연주의 먹거리를 실천하는 요리책들과 건강 관련 에세이 여러 권이 꽂혀 있었다. 당연히 실내에는 적당한 조명과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좋은 향기가 퍼져 있었다. 매장에서 브랜드가 추구하는 경험을 제공한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MUJI 롯데월드몰점 / 사진: 김근영
이 시대의 소비경험과 팝업스토어
오일장에는 있었는데 지금은 없는 것이 있다면? 어쩌면 오래전 오일장에서는 만날 수 있었는데 100년이라는 시간을 건너오면서 이제는 점점 멀어진 것은, ‘눈앞에서 이웃의 경험을 직접 보고 듣고 함께 공유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오는 신제품들 속에서 생활에 도움이 되는 물건을 고르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사람들은 실제로 나와 비슷한 니즈를 갖고 비슷한 생활을 하는 누군가로부터 들을 수 있는 찐 사용 후기에 대한 갈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1인 방송 시대에 평범한 이웃이 만드는 콘텐츠들에 눈이 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예전 공중파 방송과 4대 일간지에서 인기 최고의 연예인이 광고하는 물건들을 모두가 비슷하게 사용하던 시절과 너무도 달라진 것이다.
골라야 할 것들이 많고 소비에 쓰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사람들은 잠깐의 만족 뒤 찾아오는 긴 후회 말고, 정말 삶을 좀 더 편리하고 가치 있게 해주는 구매이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게 된다. 갈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자신의 삶에 밀착된 물건들로 생활을 꾸려가고 싶어 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를 반영하여, 제품을 만드는 사람들은 다시 사람들의 생활에 더욱더 관심을 갖게 된다. 서로가 서로를 찾기도 하고 숨기도 하는 숨바꼭질 하듯이. 이런 흐름이 팝업스토어의 성행으로 이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