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임인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문득 제가 광고 일을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났나 세어 보니 이제 15년 차에 접어들었더군요. 어지간히 광고밥을 먹을 만큼 먹었다고 생각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어렵고, 힘에 부치는, 결코 쉬워지지 않을 이 어려운 일을 붙잡고 아등바등하는 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도 연차가 쌓여 갈수록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면, 바로 ‘기본에 충실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점입니다.
어떤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고객과 시장, 광고주의 문제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기본’이 되어 있지 않다면, 화려한 파워포인트 장표와 프리젠테이션 스킬 뒤에 잠깐 숨어있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그 아이디어는 금세 바닥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광고계에 불어 닥치고 있는 디지털 바람은 또 어떻습니까? 저 역시 1년이 멀다 하고 쏟아지는 새로운 디지털 트렌드와 각종 용어의 홍수에 갈피를 못 잡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광고인 중 한 명입니다만, 그래도 변치 않은 믿음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은 미디어와 기술이 아무리 진화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고객 즉, 한 사람의 마음과 행동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는 아주 ‘기본적’인 사실입니다.
비단 광고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일이 그런 것 같습니다. 어떤 분야든 우리 시대의 대가(大家) 치고 기본기를 닦는 데 게을리한 이는 없습니다. 반대로 기본에 충실하지 못하다면 잠깐 반짝 주목을 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그 내공은 모래 위에 쌓은 성처럼 기반이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금세 우리의 기억에서 잊혀진 반짝스타를 여럿 보아왔듯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이번 호에서 소개해 드릴 이 곡은 클래식 음악 연주자들, 특히 피아니스트에게 ‘기본기’란 어떠해야 하는 가를 제대로 드러낼 수 있는 곡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The Well-tempered Clavier, 이하 평균율)」에 수록된 프렐류드(전주곡)와 푸가입니다.
「평균율」, 피아니스트의 구약 성경
흔히들 피아니스트에겐 두 권의 성경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평생 곁에 두고 펼쳐 볼 가치가 있는 피아노 연주의 정수를 담고 있는 연주곡집이란 의미를 성경에 빗대 표현한 것입니다. 그중 하나가 방금 말씀드린 총 2권으로 구성된 바흐의 <평균율>이고, 또 다른 하나는 32개의 소나타로 구성된 베토벤 「소나타 곡집」 입니다. 이 중 바흐의 「평균율」이 먼저 작곡되어(※1권이 1722년, 2권이 1742년 완성되었음) ‘구약 성경’으로 불리며, 베토벤의 <소나타 곡집>이 나중에 완성되어 ‘신약 성경’으로 불립니다.
흥미로운 점은 오늘날 피아니스트들에게 구약 성경으로 불릴 만큼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평균율>이 실은 바흐가 아들 빌헬름 프리데만(W. Friedemann) 바흐를 위해 남긴 건반악기(※바흐 시절엔 피아노라는 악기가 없었고, 피아노와 유사한 하프시코드와 클라비코드라는 건반 악기가 있었습니다) 연습용 교재였다는 점입니다. 이 주장엔 음악학자들 사이에서도 갑론을박이 있긴 하지만 바흐 스스로 이 곡을 가리켜, “평균을 클라비어 곡집의 전주곡과 푸가는 젊은 음악학도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또 어느 정도 음악을 익힌 자들에게는 ‘여가의 즐거움’을 주기 위해 만든 것이다.”라고 직접 언급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이 곡이 특별한 예술적 지향을 담은 곡이 아니라 연습과 훈련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곡이란 점에서는 이론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잠깐 바흐 가(家) 이야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바흐 집안엔 유독 음악가가 많았습니다. 약 200여 년의 세월 동안 6대(代) 거쳐 음악가만 50여 명을 배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가계(家系)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긴 합니다만, 다른 바흐들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이미 요한의 고, 증조부 시절부터 당대의 내로라하는 음악가가 여럿 배출되었고, 요한의 아들들도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성장하여 음악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습니다. 온 집안을 통틀어 예술가가 아니었던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고 하니 음악을 어지간히 해서는 바흐 가에서는 명함도 내밀기 힘든 수준입니다.
바흐 가의 사정이 이러한 까닭 때문인지 요한은 자녀를 위해 만든 일견 단순한 연습곡집조차 위대한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습니다. 바흐는 「평균율」을 작곡하면서 피아노 테크닉의 정석(定石)을 제시하였을 뿐만 있을 뿐만 아니라, 그때까지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던 조성(key)체계를 완성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서양음악의 근간을 완성한 것으로, 바흐가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특이한 점은, 자식들뿐만 아니라 당시 제자들에게까지 그 가치를 두루 인정받은 「평균율」을, 정작 바흐는 정식으로 출판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 연유엔 여러 추측이 있습니다만, 여하튼 이 때문에 피아노의 구약 성경은 ─ 마치 예수들의 제자들에 의해 필사되어 전해진 신약성경이 그랬던 것처럼 ─ 바흐 제자들의 필사를 통해서만 겨우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음악사의 재미있는 아이러니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그러나 가장 어려운 피아노 연주곡
다시 「평균율」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평균율」은 ‘모든 장조와 단조로 된 책’이라는 부제로도 불립니다. 바흐 자신이 직접 만든 「평균율」 표지에 그렇게 적어 놓았기 때문인데, 그의 말처럼 다 장조(C major)로 곡을 시작해, 다 단조(c minor), 올림 다 장조(C sharp major), 올림 다 단조(C sharp minor)로 이어지는 식으로 다(C) 조성을 빠짐없이 다룹니다. 그리고 이어서 라 장조(E major)에서부터 다시 같은 방식으로 모든 장조 및 단조, 그리고 올림/내림 반음을 포함한 조성을 MECE(Mutually Exclusive Collectively Exhaustive)적으로 ‘중복이나 누락 없이’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 조성마다 전주곡(Prelude)과 푸가(Fugue)를 한 세트로 묶었습니다. 그리하여 각 권마다 총 24개 곡, 두 권을 모두 합치면 총 48개의 전주곡과 푸가로 구성된 방대한 곡집이 완성되었습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곡은 아마도 맨 처음 연주되는 1번의 전주곡일 것입니다. 맨 처음 연주되니 조성은 당연히 다(C) 장조입니다. 아마도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보셨던, 그래서 제목은 몰라도 들으면 단박에 익숙한 바로 그 멜로디를 나도 모르게 흥얼거릴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바로 이 곡이 이 길고도 위대한 <평균율>의 첫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 되겠습니다.
애초에 작곡 목적이 바흐의 자녀와 제자, 그리고 음악을 배우는 젊은 음악도를 위한 교재이기도 했지만, 오늘날에도 피아노를 전공하는 학생이라면 「평균율」은 당연히 배워야 하는 필수 교재 중 하나입니다. 마치 대한민국 고등학생들의 필수 수학 교재인 <수학의 정석>과 비교한다면 이해가 더 쉬울 것 같습니다. 그만큼 연주 테크닉의 기초와 기본, 더 폭넓게는 현대 피아노 연주의 근간이 이 <평균율>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는 피아노의 거장들도 가장 녹음하기 어렵다고 하는, 아니 두렵다고까지 하는 곡 역시 이 「평균율」 입니다.
왜냐하면 「평균율」을 연주한다는 것은 얕은 기교로 포장이 불가능한 피아노 연주의 본질과 마주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겉멋을 부리거나 얕은수를 써서 숨을 데가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평균율」을 녹음한다는 것 ─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 ─ 은 그동안 쌓아온 명성이나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벌거벗은 채 자신의 피아니즘을 적나라하게 대중에게 드러낸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전설적인 녹음을 남긴 피아노의 거장들도 본질적으로 원론적 교재에 불과한(?) 「평균율」 녹음을 노년에 이르러서야, 아니면 적어도 스스로 자신의 내공을 의심하지 않을 정도의 경지에 올랐을 때야 도전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대중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평균율」 앨범인 구소련 출신의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Sviatoslav Richter)의 「평균율」 전곡 앨범은 그의 피아니즘이 경지에 이른 쉰을 훌쩍 넘긴 나이가 되어서야 세상에 나왔습니다. 리히터는 이전에도 연주회장에서 「평균율」을 몇 번 연주한 적은 있지만 녹음으로 남기는 것만큼은 신중에 신중을 기했습니다. 특히, 48곡 전곡 녹음은 1970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시작했습니다. 그의 나이 55세가 되던 해입니다. 그리고 앨범 완성에는 무려 3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리히터가 이미 30대부터 수많은 앨범을 남긴 것을 생각해 보면 그가 「평균율」 녹음에 얼마나 많은 고민과 정성을 들였는지 짐작이 됩니다. 이처럼 본질을 마주한다는 것은 한 시대를 풍미한 거장에게도 쉽지 않은 도전이었던 것입니다.
022년 새해 벽두에 다시 저는 생각합니다. 기술의 진보, 디지털 혁명, COVID-19과 뉴노멀… 광고계에도 변화의 바람은 매섭고, 그래서 때론 혼란스럽고 두렵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본기가 우리의 든든한 버팀목이 됩니다. 바로 고객을 가장 잘 알고, 고객의 마음을 가장 잘 움직이며, 그래서 끝내 고객을 감동시키고야 마는 우리의 기본기를 잊지 않을 때 우리는 이 혼란스러운 풍파를 묵묵히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래서 새해를 맞은 오늘 이 시간, 광고인이 갖추어야 할 기본을 잊지 않기 위해 다시 한번 바흐를 듣습니다. 모든 장조와 단조로 된 아주 길고 어려운, 그렇지만 세상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이 음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