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홍인의 사생활>은 대홍 크리에이터의 소소한 일상을 나누는 사진 에세이 코너입니다.
고작 야근이 우리의 눈과 배를 방해할 순 없으니까, 5월에도 어김없이 EATFLIX!
어린 시절 나는 혼자서 상상에 자주 빠졌다. 부모님의 “TV 그만 보고 공부해!”라는 잔소리를 들을 때마다 눈을 꼭 감고 생각했다. “제발 TV 좀 봐! 공부는 그만해!”라고 하면 공부하고 싶을지도 몰라. 잔소리 없이도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고등학생이 되자, 나는 말도 안 되는 유니버스를 만들었다. 거기선 공부가 오락이요, 오락이 공부였다. 서바이벌 예능 프로그램에 목숨을 거는 지금처럼 그때 역시도 과몰입이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기에 유니버스에 스며드는 건 누워서 떡 먹기였다. 그렇게 <무한도전>과 <꽃미남 아롱사태>를 보는 일이 의무가 되자 <쎈수학>과 <자이스토리>를 푸는 일이 오락처럼 느껴졌다.
슬퍼도 사는 건 기쁨
고작 야근이 우리의 눈과 배를 방해할 순 없으니까, 5월에도 어김없이 EATFLIX!
대홍기획 카피라이터의 음식 & 컨텐츠 큐레이션
웰컴 투 야근 유니버스
90년대생 여자, 3년 차 회사원의 EATFLIX
어린 시절 나는 혼자서 상상에 자주 빠졌다. 부모님의 “TV 그만 보고 공부해!”라는 잔소리를 들을 때마다 눈을 꼭 감고 생각했다. “제발 TV 좀 봐! 공부는 그만해!”라고 하면 공부하고 싶을지도 몰라. 잔소리 없이도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고등학생이 되자, 나는 말도 안 되는 유니버스를 만들었다. 거기선 공부가 오락이요, 오락이 공부였다. 서바이벌 예능 프로그램에 목숨을 거는 지금처럼 그때 역시도 과몰입이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기에 유니버스에 스며드는 건 누워서 떡 먹기였다. 그렇게 <무한도전>과 <꽃미남 아롱사태>를 보는 일이 의무가 되자 <쎈수학>과 <자이스토리>를 푸는 일이 오락처럼 느껴졌다.
길 가던 아무나 붙잡고 ‘하루 종일 사무실에 앉아 일 할래 아니면 볕 좋은 테라스에서 놀래?’라고 물으면 모두가 망설임 없이 후자를 택할 것이다. 난 이제 더이상 잔소리로 움직이는 어린아이가 아니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유치한 청개구리 세계관 따위가 어른스러워지기 위한 방법이 되기도 한다. 이제 음주가무도 즐길 줄 아는 어른이니까 야근을 음주로 치환해본다. 그러니까 야근이 음주요, 음주가 야근이란 말씀.
사실 알코올이 가진 이성적인 판단을 흐리게 하는 능력에 있어서 야근 또한 출중한 면이 있어 둘은 닮기도 했다. 야근에 취해 충동적으로 구매한 반스 운동화만 해도 족히 다섯 켤레는 넘으니까. 어딘가 변태처럼 들릴 수도 있고 주객전도가 된 느낌이지만, 이것이 내가 야근을 무리 없이 해내는 비법이다. 단, 그만큼 해장도 필수이니 아래에 추천하는 것들을 EATFLIX하며 숙취 없는 출근을 다짐해보자.
슬퍼도 사는 건 기쁨
80년대생 남자, 11년 차 회사원의 EATFLIX
처음 회사원이 됐을 때, 야근하면 괜한 뿌듯함이 있었다. 아무것도 할 줄 몰랐던 나도 팀에 도움되는 사람이 된 거 같고(저녁을 사다 나르는 일이 전부였으나) 취준 시절에 생각했던 바쁘고 열정적인 직장인이 된 거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요. 참 철이 없었죠? 이런 생각을 했다니. 철없던 생각은 다 사라졌으나 야근의 잔재미는 남았다. 시켜 먹는 야식, 의미 없는 농담과 몰래 나누는 윗사람 험담 그리고 야근 후 술에 취한 새벽 같은 것들 말이다. 그리고 지금 52시간 제도 덕분에 많이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남아 가끔 우리를 괴롭히는 야근을 마주하면 아주 슬퍼진다. 예전의 열정도 체력도 없는 나는 그저 눈물을 흘리며 빨리 집에 가기를 기다린다.
야근에는 보통 세 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미루고 미루고 미루다 회의가 코앞으로 다가와 여름방학 일기 쓰듯 하는 야근.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미루는 내가 한심해서 슬프다. 두 번째는 일이 정말 많아서 내가 정한 건 아니지만 지키지 않으면 큰일 나는 데드라인을 앞두고 하는 야근. 이때는 고향에 있는 엄마가 보고 싶어 슬퍼진다. 마지막은 해야 할 일은 딱히 없는데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야근이다. 주로 외부에서 오는 결과물을 기다리거나, 만약에 생길지 모르는 만약을 위해 대기할 때다. 이럴 땐 시간이 아까워서 슬프다. 이 시간을 아껴 매일 아침마다 오 분씩 붙이면 허겁지겁 버스 타는 일은 없을 텐데.
애쓴다고 빨리 끝나지 않는 이 긴 밤. 더 이상 볼 SNS 피드도 유튜브도 없고, 대놓고 영화를 볼 수도 없으니 ‘넘버 808’을 본다. 영원히 질리지 않을 컨텐츠, 살 수 있는 ‘물건’이 있다. ‘넘버 808’은 당분간 갈 수 없는, 그래서 더 가고 싶은 하와이에 있는 편집숍이다. 여행지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작은 선물가게를 구경하는 기분으로 다가오는 여름에 입으면 좋을, 누가 봐도 ‘하와이에서 샀구나’ 할 법한 티셔츠도 보고, 바닷바람에 해진 것 같은 빈티지 옷과 소품도 보고, 누군가에게 선물해서 센스를 뽐내고 싶은 그릇도 보고, 쓸모는 좀 부족하나 사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은 굿즈들도 본다. 바쁨에 어지럽혀진 바탕화면이나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은 ‘최종 최종 최종 최종.pptx’류의 파일 대신 멋지고 아름다운 것들을 보면 결코 아름답지 않은 이 밤도 조금, 아주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한 손에 올리브가 잔뜩 올라간 식은 피자를 먹으며, 언젠가 떠날 날을 상상하며 귀여운 선글라스 하나 장바구니에 담아둔다. 혹시나 내일도 야근하게 되면 사야지.
최선을 다해 안 하는 것이 최고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오면 멋지고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맛있는 것을 먹자.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