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이불은 대개가 솜이불이었다. 이불을 깔자마자 냉큼 내복 바람에 미끄러져 들어가면 아랫목의 온기보다 이불의 냉기가 먼저 느껴져 이불 안에서 몸을 비비 꼬아 대며 냉기가 가시기를 몇 분가량은 기다려야 했다. 특히 외풍이 심한 방에선 한참 동안 코끝이 냉랭하고 귀도 시려웠는데 이불을 턱 끝까지 잡아당겨 덮고 있으면 그래도 어느새 훈훈한 온기가 마법처럼 퍼져나가 아이들도 어른들도 곤한 잠을 청하기에 충분했다.
내가 태어난 해 겨울은 유독 추웠다고 한다. 겨울만 시작되면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내가 태어난 날 인천 앞바다가 얼었다는 얘기를 꺼내시곤 했는데, 그때마다 내가 살을 에이던 그날의 그 삭풍의 원인인 양 눈을 흘겨 댔다. 얼마나 추워야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겨울을 나는 동안 서울에서도 영하 이십 도 정도는 한두 번쯤 겪게 되고 한강이 얼어붙는 건 일상이던 시절이었다. 혹여 동상에 걸릴까 봐 집에 들어오면 아랫목 이불 속에서 언 발을 녹여주던 어머니는 곧바로, 갈라져 터진 손등에 연신 글리세린을 발라 댔다. 부르트고 갈라진 손등에 글리세린이 닿으면 심하게 따끔거려 외마디 비명-늘 엄살이긴 했지만-을 질러댔다. 그래도 그렇게 하룻밤만 자고 나면 감쪽같이 가라앉으니 글리세린은 웬만한 대한민국 가정의 겨울 필수품이었다. 사실 글리세린이란 명칭은 커서 알게 된 단어고, 어머니의 호칭은 늘 구리세린이었다. 농약병 같기도 한 그 갈색병을 우리도 어머니를 따라 구리세린이라고 불렀다. 겨울 내내 구리세린이 몇 병은 필요했을 것이다. 아이들은 좀처럼 집에 붙어있으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밖에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연도 날려야 되고, 어떤 날은 이웃 동네로 딱지치기나 구슬치기 원정을 다녀와야 하기도 했다. 논이나 수로가 얼면 썰매나 스케이트를 메고 달려 나가야 했고 눈이 펑펑 쏟아진 날엔 눈사람을 만들고 지칠 때까지 눈싸움을 해야 했다. 손이 성한 날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언제부턴가 겨울다운 겨울이 사라졌다. 북국 곰들이 괴로워하는 광고들이 눈에 띄기 시작할 무렵이었는지 아니면 동해안에서 명태가 사라진 무렵이었는지 알 길이 없다. 급기야 올해는 1월 말인데도 아직까지 눈을 보지 못했다. 이런 해는 평생 처음이다. 탈수증으로 주저앉은 사막 여행자의 갈증처럼 겨울 갈증 같은 것이 목을 타고 올라온다. 먼 옛날의 추억들이 신기루처럼 피어난다… 굴뚝이, 굴뚝이 보인다. 오호라, 아이들의 입이다. 입김을 뿜어내며 웃어대는 볼 빨간 아이들. 달려온다. 달려간다. 그 뒤로 하염없이 눈이 내린다. 눈물이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