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시간을 선택하는 것은 시간을 절약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고대 로마시인 호라티우스는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하루를 살아라’라고도 했습니다. 모두 시간을 아껴 쓰고 효율적으로 쓰라는 옛 선인의 조언입니다. 하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아껴 쓰기가 쉽지 않습니다. 바야흐로 ‘전 국민 타임 푸어의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입니다. 타임 푸어가 대체 뭐냐고요? 지금부터 HS애드 블로그에서 그 정체를 확인해 보시죠!
한국 직장인의 2/3가 '타임 푸어 족'?!
2018년 4월, 한 일간지의 설문 조사에 의하면 한국의 직장인 75%가 자신을 타임 푸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타임 푸어(Time Poor)’는 단어 뜻 그대로 시간에 쪼들리는 사람을 말합니다. 일에 쫓겨 자신을 위한 자유시간이 없는 사람들을 뜻하는 신조어이죠. 누군가는 타임 푸어를 ‘시간 관리를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이라 지칭하기도 하지만 현실은 조금 다릅니다.
2018년 4월, 직장인 대상 설문에 따르면 한국의 20~40대 사무직 직장인들은 점심시간을 제외하고 야근이 없는 날은 9시간 42분, 있는 날은 11시간 9분 정도 일하는 것으로 나타냈습니다. 야근 없는 날에도 이미 퇴근은 7시를 훌쩍 넘길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미래를 위한 자기계발은 어림없는 소리죠. 저녁 먹고 자기에도 빠듯한 생활을 하는 한국의 타임 푸어들은 시간 관리를 못 하기보다 관리할 시간 자체가 부족한 케이스입니다.
학생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시간을 쪼개 아르바이트하고 취업 스펙을 쌓기 위한 자격증 공부와 스터디에 투지하다 보면 어느새 시간은 훌쩍 흘러갑니다. 교양을 쌓고 취미 생활을 하거나 휴식에 쏟을 시간이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타임 푸어, 개인의 게으름이 아닌 사회적 문제
러시아에서 귀화한 한국인이자 오슬로 대학교 동양학과 교수인 박노자 씨는 자신의 저서 ‘전환의 시대’에서 타임 푸어를 ‘최악의 빈곤 형태’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산업사회가 발전하고 빈곤을 나타내는 척도가 물질에서 차츰 시간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제 타임 푸어는 또 다른 사회적 계층 문제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예를 들어 볼까요?
수도권 기준으로 하루 평균 출퇴근 시간은 2시간이 넘는다고 합니다. 만약 회사 가까운 곳에 집을 구할 여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시간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모님이 학비와 생활비, 학원비를 지원해 주는 학생들은 그만큼 아르바이트 시간을 줄여 관심 있는 분야를 공부하고 취미생활을 즐기며, 여행을 다녀오는 등 여유가 생기죠. 결국 여유 있는 사람들이 타임 푸어 문제에서 더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올해도 우후죽순 출간되는 시간 관리 서적들이 이러한 현상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워라밸’이라는 화두가 계속 사람들의 입을 오르내리고 본격적으로 주 52일 근무제가 시행되면서 타임 푸어 문제를 해결하려는 논의가 사회 각계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퇴사’ 관련 서적들도 개인의 시간을 지켜내기 위한 노력의 극단적 예일 수 있겠지요. 타임 푸어 문제가 사회적 합의를 보려면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해 보입니다. 이런 가운데 어떻게든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려는 사람들의 본능이 라이프스타일에 반영되기 시작했습니다.
타임 푸어를 위한 효율적 힐링
가뜩이나 시간이 모자란 타임 푸어들은 힐링 역시 효율적으로 소비해야 합니다.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평소에 좋아하는 활동을 하는 것 역시 짧은 시간 내에 효과적으로 이루어져야 하죠. 매년 라이프 트렌드도 이들의 니즈에 맞춰 계속 변화해 가고 있습니다.
‘혼코노’, ‘혼밥’, ‘혼술’, ‘살롱’ 문화는 타임 푸어들이 즐기는 대표적 문화입니다. 함께 밥을 먹은 뒤 2차에서 한잔하고 노래방으로 향하는 여정은 일반적인 코스였습니다. 지인들과 신나는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지만, 이는 상당한 체력과 시간을 요구합니다. 가끔은 내 속을 건드리는 사람들 때문에 상처를 받기도 하지요. 하지만 혼자 술을 마시며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다가 흥이 올랐을 때 코인 노래방에서 몇 곡을 부르고 나오면 오롯이 나만을 위한 짧은 힐링이 가능해집니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살롱’ 문화와 온라인 취미 모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기존 ‘동호회’ 등의 커뮤니티 문화는 원하는 것을 향유하기 위해 넘어야 할 벽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온라인 독서 모임이나 살롱 등 모임은 익명성과 비영속성을 기조로 한 느슨한 연대이기 때문에 인간관계나 텃세 등 불필요한 시간을 들이지 않고도 취미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호캉스’ 역시 타임 푸어들에게 어울리는 휴가 트렌드입니다. 아무리 여행이 좋더라도, 나에게 맞는 여행지를 조사하고 수시로 사이트를 들락거리며 비행기 티켓을 예매하거나 숙소를 정하는 것은 보통 노력과 시간이 들어가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호텔에서 휴가를 보내는 ‘호캉스’는 멋진 호텔을 검색하는 노력만으로 도심의 야경 속에서 편안하게 휴가를 보낼 수 있습니다. 비행기 티켓과 체류비, 현지 숙소 가격까지 생각하면 비용적인 부담도 덜하고 말이죠.
TMI 대신 PMI, 필요한 정보만 효율적으로 소비한다
‘TMI’(Too Much Information)은 타임 푸어 시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신조어입니다. 일하고 쉬기도 바쁜 시간에 쓸데없이 긴 정보는 듣지 않겠다는 강한 불만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콘텐츠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이제 사람들은 TMI 대신 PMI(Please More Information)를 원하기 시작했습니다.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을 ‘본방사수’하기보다는 핵심이 되는 부분만을 소비하고 필요하면 더 찾아보겠다는 뜻이지요.
▲<신서유기6>의 피오 '우루과이' 영상은 공식 계정에서만 270만 이상, 개인 사용자 업로드 영상까지 포함해 500만이 넘는 조회 수를 기록했습니다(출처: tvN 공식 유튜브)
유튜브에는 본방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개인 사용자들이 만든 ‘방송 클립’이 올라옵니다. 방송 클립은 방송의 하이라이트 부분만 편집한 짧은 영상을 말하는데요. 과거에는 미디어에서 방송 클립들을 업로드하지 못하도록 단속했지만, 이제는 하이라이트를 요약한 방송 클립을 직접 업로드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2018년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TV프로 1위’를 차지한 tvN 예능 ‘신서유기 6’의 하이라이트였던 ‘우루과이’ 관련 방송 클립은 유튜브 검색 첫 페이지 조회 수만 합쳐도 500만 회를 넘길 정도로 인기가 많았습니다.
최근 한국형 좀비 드라마 <킹덤>을 내놓아 이슈가 되고 있는 넷플릭스는 2014년 ‘모바일 이용자의 87%가 10분 이내로 재생했다’는 통계를 내놓으면서 주요 장면을 2~5분 내로 편집한 ‘Short Clip’ 서비스 출시를 발표하기도 했는데요. 이러한 트렌드에 맞춰 아예 방송 클립 자체가 정규 콘텐츠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습니다.
본격적인 타임 푸어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세상은 큐레이션과 축약, 스킵(skip)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오래전부터 하루는 모든 사람에게 24시간으로 동일하게 주어져 왔어요. 달라진 것은 우리가 시간을 대하는 태도인지도 모릅니다. 시간을 아끼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유한한 시간’의 의미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