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순간 새롭게 창조되는 예술이란 이런 걸까? 섹시하고 아방가르드한 비주얼은 우리 안의 소심함을 내쫓는다. 리듬의 틀을 깨는 오묘한 음색과 몸짓은 함께 놀고 싶은 열망을 한껏 부추긴다. 이 유니크한 매력 속에 ‘경기민요의 본질’이 살아 숨 쉰다. 밴드 ‘씽씽’의 가치는 해외에서 먼저 알아봤다. 아시아계 최초로 NPR Music Tiny Desk Concert에 출연 후 유튜브 100만 뷰를 돌파했다. ‘결국 터질 것이 터졌다’는 반응이다.
전통음악계 최초다. 씽씽 리더 이희문은 경기 명창임에도, 자신을 ‘B급 소리꾼’이라 자처하며 국악의 격식과 형식을 무너뜨렸다. 어느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것을 자기만의 판에 새롭게 재창조해 냄으로써, 모두가 외면했던 우리 민요를 ‘보고, 듣고, 사랑하게’ 만들었다. “그저 발견한 것뿐이에요” 담담하게 말하지만, 그는 경기민요의 맥락을 꿰뚫어 발견한 본질적 레퍼토리를, 낯선 재료들과 황금비율로 믹스해 ‘되살려’ 냈다. 세계인과 애씀 없이 소통하는 육감까지 발휘해 냈다. 자신만의 놀이를 공들여 갈고닦아온 저력이 이질적인 것들과의 ‘융화를 일으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이희문만의 ‘초월적 세계’로 펼쳐진 것이다.
“놀고 노세요. 놀아본 사람만이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어요”
앞으로의 모든 크리에이티브는 이런 식으로 진화되어 나가게 되지 않을까? 자기만의 것을 기반으로 모든 걸 융합해야 하는 시대, 크리에이터들은 이희문처럼 자신 안에 숨겨놓았던 끼를 맘껏 발산하며 제대로 섞여 놀 줄 알아야 할 때다.
Q. 스스로를 ‘뜬구름 잡는 소리꾼’이라 칭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2013년 ‘잡(雜)’으로 앨범 작업을 해 주던 친한 동생이 ‘형, 형은 왜 그렇게 뜬구름 잡는 일만 해요?’하고 툭 던진 말인데, 순간 가슴에 확- 번졌어요. 사실 이 시대 소리꾼 행위를 하며 산다는 게 비현실적이긴 하잖아요. 하지만 ‘왜 안돼?’에 진짜 삶의 길이 있는 것 같았어요. 계속 이렇게 살아도 되겠구나 싶어 스스로에게 붙여준 타이틀이에요.
Q. '이희문컴퍼니'를 자유롭게 소개해 주세요.
이희문컴퍼니는 ‘전통 음악을, 관객에게 들리게 하고 즐기게 하는 음악으로 만들 수는 없을까?’에서 시작됐어요. 방대한 레퍼토리의 보고인 경기민요를 모티브로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와 협업합니다. 전통과 현대, 남성과 여성, 과거와 미래 등 모든 경계를 깨고 하나로 융합시키는 실험적 작품들을 만들어 내고 있어요.
Q. 음악계 완전히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켰다는 평을 얻고 계세요. 실은 경기 역사와 음악을 콜럼버스처럼 탐험해 ‘발견’해 내신 거라고요?
경기민요는 미개척의 척박한 땅과 같아요. 레퍼토리의 굉장한 보고라고 할 수 있어요. 제가 없던 걸 만들어 내는게 아니에요. 경기 역사를 파고들다 보면 그간 경기소리가 어떻게 이 땅에 존재해 왔으며, 또 어마어마하게 묻혀 있는 본질적 재료들을 어떤 방식으로 되살려내면 좋을지 영감이 두둥실 떠오릅니다.
미술이나 현대 무용과 달리, 국악에서는 주제와 콘셉트가 분명한 컨템퍼러리한 공연의 시도가 없었어요. ‘왜 하는지’ ‘무엇을 이야기하려는지’ 그 한 줄이 있으면 쫙 풀리거든요. 그게 없으면 장황한 나열식 공연으로 끝나요. 제 스스로가 지루한 국악 공연을 싫어하다 보니,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분명하되, ‘소통되는 예술’로 승화시켜 내는데 초점을 맞출 뿐입니다.
Q. 경기민요 역사를 꿰뚫어 섞일 수 없을 것 같은 재료들을 모아 섞고, 해체하고, 재창조 해내는 작업들은, 마치 우리가 잃어버렸던 어떤 원형의 복원 작업처럼 느껴집니다. 전통음악계 반응이 무척 궁금한데요?
‘이단아’ ‘B급 소리꾼’ 등 다양한 소릴 듣죠. 하지만 전 이런 말이 좋아요. 예술가의 권위나 특권의식을 무너뜨리잖아요. 우리가 언제부터 격을 세웠나요? 외국에서 공연장 문화가 도입되기 전의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전통은 원래 격이 없었어요. 우리 문화 자체가 극장 문화가 아니었기에, 너와 내가 가까운 밀착된 공간에서 함께 호흡하는 ‘흥’과 ‘자연’만이 살아있었죠. 옛날 잔칫집 문화만 보더라도 ‘선’과 ‘턱’이 없었어요. 그냥 넘나들었단 말이에요.
제가 한복 입고 웨이브하고, 여장하고 망사스타킹 신고 하는..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이 어디에 있나요? 예나 지금이나 예술가들은 영혼이 자유로운 법인데, 언제부터 이렇게 하지 말라고 하는 것들이 많아졌을까요? 인류 역사는 억압의 역사라 하지만, 일제 강점기 때 들어온 게이샤 교육 문화 영향도 커요. 남자 소리꾼이 대부분이었고, 놀이 문화에 대한 사고가 굉장히 유연하고 크리에이티브했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의 문화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면서 획일적으로 경직되어 버린 부분도 무시 못해요.
사실 제가 만들어 내는 음악의 스타일들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에요. 결국 본질에서 멀어진 전체성과 유연성을 되찾는 작업이라 생각해요.
Q. 전통민요로 관객의 ‘몰입’과 ‘교감’을 큰 애씀 없이 이끌어내는 희문님만의 창작 원리 비법 같은 것이 있나요?
모든 복잡한 것은 알고 보면 원리가 단순해요. 제 소리의 목적 또한 단순해요. 놀려고요. 눈치채셨나 모르겠지만 제 노래는 전통의 틀, 규칙 따윈 없어요. 중간에 멈추기도 하고, 음정 박자 다 틀려요. 내가 즐거운 게 모토예요. ‘여러분~ 즐거우시죠? 한다고 즐거워질까요?’ 무대에서 내가 즐겁지 않으면, 관객과의 교감이 일어나질 않아요. 잘 해야 한다는 생각을 애초에 버렸어요. 생난리 부르스 나죠. 외국에서도 처음엔 ‘아시아 애들인데 왜 저래?’ 관심도 없다가 우리끼리 즐거워 난리를 치니까 보거든요. 30분 정도 기싸움을 해요. 결국 이기죠. 어느새 무대 경계까지 사라져 즐겁게 뒤섞여 놀고 있어요.
전통을 배운 대로 지키는 것이 아닌, 제 삶과 몸에 맞게 여과시켜서 저만의 스타일로 만들어 내며 놀 때, 그 진정성이 관객에게까지 고스란히 전달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Q. 오랫동안 그려온 뮤직비디오 감독의 꿈을 접고, 늦은 나이에 소리꾼이 되셨어요.
제가 하나에 꽂히면 끝까지 파고드는 스타일이에요. 어릴 때부터 가수 민해경씨를 좋아해 노래하는 댄스가수가 되고 싶었고, 마돈나의 영향으로 일본에서 유학하며 뮤직비디오 감독의 꿈도 키웠죠. 귀국 후엔 싸이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 만드신 조수현 감독님 밑에서 조감독 생활을 해 왔어요.
그러던 중, 소리꾼이란 제2의 인생을 살게 해 준 분이 계세요. 경기민요 인간문화재이신 어머님 친구 이춘희 선생님이세요. 함께 공연을 보러 갔다가 제가 소리를 흥얼거리니 신기하셨나 봐요. ‘너, 소리 해볼래?’ 하시는데 깜짝 놀랐어요. 27년 살면서 처음 들어본 말이었거든요. 남자 소리꾼은 금기된 일이기도 했고요. 그 소릴 듣는데 느낌이 신선했어요. ‘나도 할 수 있을까?’하며 오디션을 보게 되었죠. 경기 민요 중에서도 까다롭다는 ‘긴 아리랑’을 불렀는데 ‘너 소리 해야겠다’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뒤늦게 시작했어요. 취미로 시작했는데 점점 소리가 좋아졌어요. 나만의 소리를 찾고 싶단 열망도 강해져, 몰래 보컬 학원 다니면서 저만의 발성법도 터득했어요. ‘내가 진짜 소리꾼이 되려나?’ 어렴풋이 생각만 하던 중 소리경연대회 나갔다가 덜컥 2등을 한 거예요. 선생님께서 귓속말로 ‘남자 소리꾼이 하나 나왔네’ 하셨죠. 그 길로 소리꾼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명창이셨던 어머님의 영향으로 늘 제 몸이 기억하는 소리인데다, 늘 좋아하는 일에 하나씩 하나씩 꽂혀왔던 터라, 소리꾼으로서의 전향은 매우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던 것 같아요.
“세 명의 엄니들로부터 ‘핏줄’과 ‘소릿줄’과 ‘춤줄’을 이어받은 이희문" (송현민 음악평론가)
Q. 소리꾼의 세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차세대 경기민요 주자셨어요. 그러나 스승의 가르침을 그대로 잇는 것이 아닌,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드는 실험들로 그야말로 ‘도발’을 하셨어요. 전통과의 충돌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 같은데, 끝까지 밀고 가는 힘은 어디서 비롯됐나요?
어릴 때를 떠올리면 늘 혼자였어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데다 어머니가 늘상 바쁘셔서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거든요. 혼자 놀다 보니 말이 없고 내성적이었는데, 의외로 엉뚱한 기질이 있었어요. 길 가다 음악이 흐르면 친구들이, ‘야 창피하게 왜 이래~’ 할 정도로 저도 모르게 노래를 따라 하거나 몸을 흔들곤 했어요. 제 몸 안에 흐르는 끼의 발산은 시간문제였죠.
뮤직비디오 감독의 꿈을 접고 ‘소리’ 하나로 뜻을 모았을 때도 쉽지 않은 길이었어요. 전통에선 ‘안돼!’ 하는 게 많으니 말도 많고 탈도 많았죠. 제가 어딜 가든 튀었거든요. 그걸 숨겨야 한다고 생각하니 답답했어요. ‘소리라는 건 좋지만 내가 있기가 힘든 곳이구나.’ 관둘까 말까를 3~4년 정도 고민하던 차에 안은미 선생님을 만난 거예요. 제 인생이 스펙터클하게 돌아가기 시작했어요. 전통에선 통하지 않던 것들이 그곳에선 다 가능했어요. 설레고 흥분되기 시작했어요.
https://www.youtube.com/watch?v=la3nr9g2-18
Q. ‘춤줄’을 주신 ‘안은미 선생님’, 희문님의 삶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끼치셨나요?
‘서로 다름’을 존중하는 가치관을 일깨워 주셨어요. 우리 사회 조직은 천편일률적으로 같아야 한다고 무언의 압력을 행사해요. 특히 안 되는 것 너무 많고. 튀는 행동하면 조직에선 오래 살아남기 힘들죠. 안은미 선생님은 제 안에 억압되어 있던 것들을 꿰뚫으셨던 것 같아요. ‘네가 하니까 빛나는 거야. 너무 좋다. 너무 잘한다.’ 바람을 넣어 주셨어요. 제가 칭찬받으면 더 잘하는 스타일(웃음). 어릴 때 결핍되고 절제된 감각들이 다 해소되는 듯했어요. ‘틀 안에 갇히지 말고 네 안에 숨겨두었던 끼를 다 쏟아내라. 여성적인 면을 창피해 말아라.’ 더 두드러지게 내 보여도 된다고 끊임없이 저를 자극시켜 주신 분이죠.
선생님 작품 ‘프린세스바리’에 캐스팅이 되어 10년간 유럽 전역을 돌았죠. 그 작품에서 제가 맡은 역할이 뭔지 아세요? ‘바리공주’(여기서 웃음 터져줘야 하는데 ㅋㅋ) 캐스팅 오디션을 볼 때 노래방에서 1시간 동안 오디션을 보시거든요? “공주 같은 애가 없네? 바리공주 니가 해야 되겠다.”해서 얼떨결에 하게 됐어요. 외양도 목소리 톤 자체도 중성적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주인공을 하게 됐죠. 유럽에서 장기 히트 친 공연이에요. 바리공주 설화를 보면 여아를 많이 낳게 되면 버리는 시대였는데, 딸을 더 귀하게 바꾼 코드가 유럽을 강타한 거예요. 막내딸로 태어나 버려진 바리는 삶의 역경을 겪고 해탈에 이르러 죽은 사람을 천도하는 신적인 존재예요. 샤머니즘의 무당 콘셉트 뒤에 숨어서 제가 그간 하고 싶었던, 숨겨 왔던 모든 것들을 다 터트려 버린 공연이에요.
안은미 선생님은 ‘내가 전통 소리로 완전히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겠구나’ 자신감을 갖게 해 준 분이에요. 이후 ‘안은미컴퍼니’를 창조적으로 모방해(웃음) ‘이희문컴퍼니’를 열고, 현대적인데 전통은 창법을 고수하는 저만의 프로젝트를 시도해 왔어요.
Q. 이후 ‘이희문’만이 할 수 있는 공연을 본격적으로 만드셨어요. 외면받다시피 했던 우리 민요를 젊은 층까지 듣고 보게 만드셨는데요, 대표 프로젝트를 소개해 주세요.
앞서 언급했지만 경기 민요에는 재료가 정말 너무 많았어요.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가 녹아있는 레퍼토리를 하나씩 꺼내 살아 움직이게 만들고 싶었어요. 관객이 일방적으로 보는 기성 공연이 아닌, 하나의 탄탄한 스토리에 저만의 색깔을 담아 관객과 즐길 수 있는 공연을 만드는 데 주력했어요.
오더메이드(Order-Made) 레퍼토리인 ‘잡(雜)’ ‘쾌(快)’ ‘탐(貪)’ 시리즈로 이어갔어요. 첫 번째 잡(雜)은 경기소리 중 전문 소리꾼에 의해서만 불렸지만, 이 시대에 제대로 숨 쉬지 못하고 있던 ‘잡가’를 일으켜 세운 공연이에요. 화려한 예술가들과의 협업과 제 잡스러움이 더해져 한 층 독특하고도 깊이 있게 재탄생되었다는 평을 얻었죠. 현재 씽씽으로 활동하고 있는 장영규(베이스), 이태원(키보드, 일렉기타)씨가 6곡씩을 편곡을 해 줬죠. 안은미 선생님이 연출로 참여해 주셨고요. 공도 돈도 많이 들였기에 더욱 애착이 많이 가는 작품이에요. 특히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열리는 국제종합예술축제인‘파브리카 유로파(Fabbrica Europa)’ 페스티벌에 아시아 최초 오프닝 공연으로 초청되어 더 의미 있는 작품이에요.
Q. 오더메이드 두 번째 작품인 ‘쾌(快)’는 현재의 씽씽을 있게 한 공연이라고요. 이 작품을 통해 ‘모든 두려움이 사라진 상태’ 경험의 비하인드도 들려주세요.
스스로의 끼를 감추고 사는 이들(관객)과 밀착 교감하는 공연이었어요. 누구나에게 깊이 잠재된 야릇하고 발칙한 ‘쾌’를 소환하고 ‘굿판’의식을 벌여 잃어버린 자신을 되찾아 준다는 스토리죠. 많은 이들이 몸도 마음도 정체되어 있는데, 사실 춤추고 흔들며 사는 게 생명의 자연스러운 흐름이거든요 굿의 뿌리인 무속음악은 시대를 거치면서 변질되긴 했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힐링’이라는 본질을 그대로 살려내려 했던 공연입니다.
이걸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내기 위해 제가 생각하는 화려하고 원색적인 무당의 이미지를 만들어 공연에 녹여냈죠. 화려한 가발, 열 손가락에 반지, 반짝이 소재 의상에, 망사스타킹까지 신었죠. 저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경험과도 같았어요.
그러나 ‘전통 공연을 한다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해야 해?’라는 시선에, 저도 모르게 스트레스가 있었나 봐요. 공연이 끝나갈 즈음 극도의 스트레스와 두드러기, 역류성 식도염 등 홍역을 앓았어요. 그러고 나니 신기하게 ‘두려움’이 사라졌어요. 아무것도 아닌 허상임을 보았어요. 내가 이러는 게 이유가 있어서 하는 일인데, 그렇게 힘들었나? ‘넘어야 할 산을 넘었구나’ 하는 그런 마음이었죠.
Q. 우연한 기적이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씽씽이 미국 공영 라디오 NPR의 간판 프로그램인 '작은 책상 콘서트'(Tiny Desk Concert)에 초대됐다가 순식간에 유튜브 100만이 터졌어요. 아시아계 최초였다면서요? 어떤 마음이 드셨어요?
개인적으로 씽씽의 전신이라고 생각하는 ‘쾌’ 공연에서 퍼포먼스를 빼고 기존의 곡과 새로운 곡들을 추가하여 홍대 클럽으로 갔고, 씽씽으로 3년 정도 공연해 오다가 해외로 나가게 됐어요. 투어 중 딱 하루 쉬는 날 NPR 워싱턴 방송국에서 우연히 하게 된 공연이에요. 사실 어떤 방송인지도 잘 모르고 평소처럼 놀듯이 찍은 건데 그게 터진 거예요. 전통음악 하면서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어요.
씽씽으로 클럽에서 몇 년 간 놀아본 저력이 있기에 된 것이라 생각해요. 끝까지 놀 수 있었던 마음, 끼와 실력이 갈고 닦여져서 그렇게 된 거지 한 번에 짠 하고 된 것이 아니에요.
‘한국이라는 나라가 이렇구나’ 알고는 있었어요. 하지만 Tiny Desk Concert 툴을 모르고 있다가, 그 파급력을 느끼며 놀랐죠. 외국 팬들한테 먼저 댓글이 달리기 시작하더니, 한국 팬들도 물밀 듯 밀고 들어오는데 ‘생각보다 우리가 팬이 많구나’ ‘신기하다’ ‘해외에서 뜨니까 비로소 인정해 주는구나…’ 뭐 그랬죠.
Q. 소리꾼 3분과 영화음악 감독 등으로 구성된 멤버의 조합도 크리에이티브해요.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 분들을 어떻게 리드해 가며 시너지를 내시는지 궁금합니다.
소리꾼은 저와 타악 전공 출신의 새내기 소리꾼 ‘신승태’, 전통뮤지컬을 전공한 소리꾼 ‘추다혜’로, 기타는 똑똑한 괴짜 ‘이태원’, 최고 동안 드러머 ‘이철희’, 베이스는 어어부 밴드 멤버이자 영화 음악 감독 ‘장영규’. 이 조화가 참 재밌어요. 6명 멤버의 개성이 다 달라요. 강요하면 절대 안 하는 자유영혼들이죠. 어느 한 곳에서도 만나지 않는 평행선 6개가 있는 느낌이랄까요? 온기가 부족한 팀이죠(웃음). 마치 외인구단 같아요. 근데 무대 올라가면 신기할 정도로 잘 맞아요. 무대에서만 잘 놀고 각자 생활해요. 서로 다름을 존중하고, 각자만의 개성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시너지를 냅니다.
Q. Tiny Desk Concert 이후 씽씽 공연 만나기가 힘들어졌어요. 2월 4일 공연도 벌써 매진이라니요.
Tiny에 영상이 터진 직후인 11월 클럽공연은 현장에서 8분 만에 솔드아웃됐어요. 더 놀란 건 무대 위에서였어요. 관객 기운이 달라요. Tiny Desk Concert에 나왔던 3곡을 다 따라 해 주시는 거예요 떼창을 하니까 관객에 압도되는 느낌? 무서웠어요(웃음) 재미있었어요. 2월 4일은 공연장이 커져요. 500~600분 들어갈 수 있는 곳으로 했는데, 그것도 티켓오픈 11분 만에 솔드아웃됐어요. 저 혼자 하는 공연이었음 이 정돈 아니었을 텐데.. (웃음), 다 씽씽밴드 멤버들의 힘이죠.
Q. 씽씽밴드가 꼭 지키고 싶은 가치가 있나요?
유튜브 100만 돌파 후 씽씽은 해외에서 더 각광받고 있어요. 연예, 방송가에서도 이슈 되다 보니 수많은 방송 출연 요청이 들어와요. 우리끼리 약속한 것이 있어요. 방송보다는 되도록 공연을 하자고. 방송이란 게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이 있는 그대로 반영되기가 힘들잖아요. 원하는 부분만 편집해 보여주니까. ‘우리 소리에 대한 의식’이 ‘왜곡’ 될 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편이에요. 씽씽만의 고유 색채와 테크니컬한 부분으로 승부를 걸고 싶어요. 좀 더 공연에 집중할 생각이에요.
Q. 휘발성 공연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서도 레퍼토리 예술을 긴 호흡으로 끌어오셨어요. 우리 문화예술이 생명력을 지속하려면 국가문화정책차원에서 어떻게 풀어가면 좋을까요?
대한민국은 휘발되는 콘텐츠 생산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 같아요. 공연 문화 또한 1회성 휘발 공연이 다수에요. 사실 예술은 그 해에 좋았던 공연을 레퍼토리로 계속 만들어줄 필요가 있어요. 예술가가 표현하려고 했던 정신이 녹아든 작품은 절대적 시간을 겪으며 사골국물처럼 푹 익혀져야 생명력이 있는 거거든요.
유럽의 경우 좋은 작품이 나오면 전 지역 투어 할 수 있게 지원해 주는 게 일반적인데, 우리나라의 경우 정부자금으로 운영되는 극장은 실적을 만들기 위해 해마다 새 공연을 만들어요. 레퍼토리를 살려주지 않는 문화정책. 과연 누구를 위하는 것인지. 문화 정책은 그 나라의 문화 의식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생각해요. 예술가들이 제대로 된 예술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국가적 풍토가 하루빨리 조성되었으면 좋겠어요.
아마 씽씽도 한국에서만 했었으면 안 됐을 거예요. 상품적 가치를 올리려는 행위를 아예 안 했기에.
Q. 과거 경기 소리가 예술적으로 소통되던 독특한 공간, ‘깊은 사랑(舍廊)’을 재현해 낸 작품에 상당한 애착을 갖고 계세요.
서양에 ‘살롱 문화’가 있다면 국악엔 ‘깊은 사랑’이 있어서 예술이 성장, 진화해 왔다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경기 소리의 역사를 거슬러가면, 노는 땅속에 한시적으로 땅을 파내어 만든 움과 같은 방이 있었어요. 깊은 곳에 사랑방이 생겼다 하여 이곳을 ‘깊은 사랑(舍廊)’이라 불렀어요. 일 하다 지친 이들이 잠시 눈을 붙이고 서로의 일상을 나누기도, 귀명창(매니아, 애호가)들이 소리꾼을 불러 마음을 달래기도 했던 공간이었죠. 날계란을 옆에 쌓아두고 먹어가며, 꼿꼿하게 않아, 쉬지 않고 소리를 했다더군요. 경기 소리꾼들에겐 하나의 통과의례(通過儀禮)가 되던 자리이기도 했다고 해요.
당대 근원적인 삶의 공간이자 현재는 사라져간 곳인데, 서촌공간 ‘서로’를 통해서, 이런 고유 공간을 ‘문화적’인 의미로 그대로 재현해 내고자 했어요. 서촌은 조선 후기와 일제 강점기 풍류 문화와 연관된 곳이고 서로라는 지하 공간에 마련된 공연장은 과거로 연결되기에 충분했고요.
저는 사실 큰 무대는 두렵지 않아요. ‘깊은 사랑’같은 작은 무대가 더 힘들어요. 관객의 눈빛이 보이잖아요. 또한 관객은 소리꾼의 피부의 떨림은 물론 숨결조차 다 느낄 수 있어요. 관객과 밀착된 공간에서 이야기와 음악이 아름답게 공존하며 경기 소리를 올곧게 전달하고 지켜낼 수 있는 저만의 방법이라 생각했어요. ‘제 스스로가 더 단단해지고 좋은 소리꾼이 되어 간다는 걸 알게 해 주는 공연’인지라 가장 주력하고 있어요. 올해는 5~6월경 선보일 예정입니다
Q. 본질을 어떻게 지키고 확산시켜야 하는지 힌트를 얻은 것 같은 인터뷰였어요. 앞으로 꼭 시도해 보고 싶은 프로젝트가 있나요?
조금은 연기적인 요소와 소리가 융합된 1인 뮤지컬을 생각하고 있어요. 헤드윅처럼 못다 한 이야기, 제 안에 남아있는 이야기들을 더 직설적으로 꺼내 놓고 싶은 것도 있고요. 일단 여기까지(웃음).
Q. 희문님의 미래의 모습, 꿈을 그려본다면요?
조용한 곳에서 공연계 무림의 고수처럼 살고 싶어요. 앞에 나서지 않고 꼭 필요할 때만 보여지는. 내가 하고 싶은 작품에만 몰입하는. 외부적 상황이나 타인의 가치관에 휘둘리지 않는 공연을 만들면서요.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고. 소리의 본질에 닿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며 살아가게 될 것 같아요.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넘치게 받은 것들을, 아낌없이 되돌려 주며 살아가는 꿈을 꿉니다.
Q. 새 시대를 준비하는 크리에이터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
크리에이터들은 놀고 놀아야 돼요. 다른 것들과도 섞여 놀 줄 알아야 해요. 그러다 보면 모르던 것을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더 밀착적이면서도 광범위하게 놀게 됩니다. 그 안에 있을 때 아이디어가 빵빵 터지거든요. 서로 격식을 차리는 사이에서는 좋은 아이디어가 나올 수가 없어요.
‘뜬구름 잡는 것’들이 그런 맥락하고 닿아 있는 것 같아요. 예술하는 사람들 다 뜬구름 잡고 있잖아요. 돈과 지식만 추구하는 삶은 생명력을 주지 못해요. 강렬한 영감의 아이디어를 끌어내려면 뜬구름 잡는 사람들과 놀고 노세요. ‘살고 있다는 느낌 속’에 있게 되실 거예요.
샤우트 376호에서 보기 http://www.pentabreed.com/newsletter/newsletter376.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