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백 년의 완성도를 갖춘 글자, 한글
조선 초 세종대왕이 글을 모르는 백성을 위해 조정의 학자들을 밤새워 엄청난 야근을 시키며 한 땀 한 땀 만든 한글. 한글의 시초 '훈민정읍 해례본'을 처음 봤을 때 어찌 이렇게 감각적일까 하고 생각한 건 나뿐이었을까. 세모, 네모, 동그라미가 한자 사이에서 그 음을 떠올리게 하는 그 기하학적인 기호 같은 한글의 조형적 모양새는 동양은 물론 서양에서도 그 독창적인 아름다움과 효율성에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나는 한글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는 않았다. 90년대 그래픽을 전공하면서 6백여 년간 네모틀 속에 갇혀 있던 한글꼴이 한글의 새로운 글꼴들의 이탈로 시도되는 것을 보아온 세대다. 순식간에 한글꼴의 종류가 디지털이라는 제작도구와 과정에 의해 다양하게 수만 가지의 색깔로 변화하는 것을 지켜봤다. 최초 탈 네모꼴 한글은 가독성이 떨어져 그저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시도로만 묻히는가 했지만, 샘이깊은물체, 안상수체로 조형미와 실용성을 인정받으며 대중화됐다.
그런 서체 디자인을 실무에 적용하면서 이 글자들의 조합으로 단순한 지면에 생동감이 생긴다는 것이 놀라웠다. 매번 실수와 후회를 번복하면서 느끼는 건, 한글꼴에는 다양한 공간과 형태 그리고 긴장감과 웃음, 힘과 품위 같은 것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늘 후배들에게 이 활자들이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지금 막 들어온 신입사원이든 경력을 쌓은 중견이든 디자이너가 타이포그래피 분야, 특히 한글 디자인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연마하면 직장에서 유리한 고지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생각보다 글자꼴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디자이너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은 서체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개인용 활자꼴 프로그램도 나와 있어서 타이포그래피를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아도 기본적인 감각과 태도만 있다면 어렵지 않게 나만의 서체를 만들 수 있다. 기업들은 자신들만의 전용 서체를 개발해 전략적이고 효율적으로 활용한다. 우리도 이노다움체를 개발해 활용하고 있다.
대충 올라탄 글씨들
과거에는 인쇄매체가 전부였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온라인 매체인 TV, 모바일 단말기 등 새로운 매체가 등장하고 그 발달에 맞춰 다양한 글자꼴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아이디어를 표현하고 제작하는 과정에서도 늘 창의적인 도전은 멈춰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디자이너들의 그 창의적인 노력이 고스란히 모든 이들이 이해하는 광고의 형태 속에 녹아들어 반영되기 때문이다.
서체도 마찬가지다. 자연을 찬미할 때에는 유려한 이탤릭체를, 심장을 고동치게 하는 선언문에는 돋움체를, 신뢰도를 높이고자 할 땐 신문명조체를 쓰는 등, 조용한 체가 필요한지, 근육질의 힘 있는 체가 필요한지 디자이너의 감각으로 정서를 강력하게 어필한다.
광고의 완성도가 대충 올라탄 글씨들로 인해 실패하는 것을 여러 차례 보았다. 그 반대로 별거 없던 것이 단어와 단어 사이, 서체와 다른 서체 안에서 상관관계를 가지며 흥미로워진 적도 있다. 자연스럽고, 빈틈없이 자신이 의도한 대로 스타일, 크기, 무게, 폭, 색상, 대비를 그 외의 다른 요소들과 감안하며 보정되고 조정되어야 한다. 글 한 자 한 자가 완성도를 결정짓는 작고도 큰 요소이다.
법칙과 규칙이 깨지는 미래의 글꼴
수백 년을 거쳐 바뀌고 다듬어진 한글을 볼 때면 정말 이보다 아름다운 철학을 가진 폰트 디자인은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미디어 플랫폼이 진화하면서 활자의 역할이 확대되고 있다. 그래도 이 폰트 분야에서는 사람이 주다. 세종대왕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보다 객관적인 자료, 합리적인 판단으로 글자를 만들었으니, 이러한 한글 창조의 배경은 우리 디자이너에겐 매우 중요한 철학이다.
인간의 고령화는 심화되고, 기기는 작아지고, 어떤 환경에서도 글자를 쉽게 읽혀야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에 디자이너에게는 점점 난제가 많아진다. 새로운 매체와 환경 속에서 더 이상 글자는 2차원의 평면에서 움직임 없는 글자가 아니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글자는 움직이고 홀로그램과 같은 3차원, 4차원 공간에서도 사용된다고 한다. 가슴 뛰는 일이 지금도 어딘가에서 실험되고 있을 것이다.
가독성은 좋은지, 손에 들고 볼 수 있는 것인지, 빛이 반사되어 글자를 읽어야 하는 환경인지, 텍스트를 읽는 거리는 어떠한지, 인쇄종이가 무광인지 유광인지,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는지... 누구보다 한글을 통해 소통하므로 카피 한 줄 옮겨 쓰는 것에도 무엇 하나 놓치지 않고 고민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지금 순간에도 미래 환경에 대응하는 새로운 매체들이 생겨나고 그것에 맞춰 새로운 글자들이 탄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