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후'인 게 뭐 어때서?
뭔가를(아주 많이) 좋아하는 게 그렇게 부끄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이 '덕후'라는 표현에서 오는 부담감 때문일지 모르겠다. '안여돼(안경 쓰고 여드름 난 못생긴 돼지', 제 앞가림 못하고 골방에 틀어박혀 게인과 애니메이션만 파는 사회부적응자. 흔히들 생각하는 오타쿠의 정형화된 이미지다. "좋아하기는 하지만 덕후까지는 아니다.'고 손사래 치며 덕후라 불리는 걸 애써 부정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도 이런 이유다. 물론 초기의 오타쿠가 애니메이션, 게임, SF 영화 등에 광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사교성이 결여된 인물로 부정적 의미를 포함한 건 맞다.
하지만 지금의 덕후는 다르다.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를 깊이 있게 즐기며, 마니아를 넘어선 그 분야의 전문가'라는 긍정적 의미로 통용되고 있지 않은가. 비록 덕후라는 표현이 오타쿠에서 파생된 것이긴 하나, 이를 대체할 말은 없어 보인다. 과거엔 팬, 마니아, 수집가 등으로 칭하던 분야에까지 덕후, 덕력, 덕질, 덕밍아웃 등 관련 신조어를 다양하게 쏟아내며 덕후는 정체성을 새롭게 다져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덕후는 긍정적인 사회 인식의 변화와 시대의 흐름이 반영된 살아있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이제 무언가를 전문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가리킬 때 '마니아'라는 표현 대신 단어 뒤에 '-덕후', '-덕'을 붙이는 것이 자연스럽게 됐다. 과거라면 백종원은 '맛집 마니아'가 외식 업체 대표로 성공한 케이스로 소개되겠지만, 이젠 '맛집 덕후'의 끝판왕으로 묘사되어 사람들에게 보다 친숙한 이미지로 다가서고 있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클래식에 심취해 음반을 사 모으는 사람들을 '클덕' , 뮤지컬을 좋아해서 몇 번이나 같은 작품을 재관람하는 사람들을 '뮤덕'이라고 부르는 데 전혀 위화감이 없다. 문화뿐 아니라 빵덕, 책덕, 밀덕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종류의 덕이 출몰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화장품 덕후, 이불 덕후, 물덕후 등 일상의 작은 행복과 개인의 취향에 집중하는 새로운 세력들이 부상하며 덕질의 영역은 더 이상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도라에몽 덕후'로 유명한 배우 심형탁, 일본 영화 <간츠>의 홍보대사로 발탁된 '건담 덕후' 이시영, 레고랜드 홍보대사로 활약한 '레고 덕후' 지진희 등 최근 몇 년 사이 덕밍아웃한 스타들도 늘었다. 이들은 번듯한 직업을 가지고 성공적으로 사회생활을 하면서 엄청난 정성과 열정을 들여 덕질까지 하는 부지런함을 갖췄다.
이러한 TV스타들의 덕밍아웃은 음지에 있던 덕후들을 양지로 끌어올리는 데 큰 몫을 했다. 덕후의 신분으로 입신양명한 이들 사례가 대중들의 인식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이로써 한 분야에 치밀하게 파고드는 열정과 노력을 전문성으로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자연스레 자리 잡았다. 덕후는 자신의 취향이 있고 스토리가 있는 개성적인 인물이며 그들의 놀라운 애정은 각박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부러움과 대리만족의 대상이 됐다.
세상을 바꾸는 덕후
덕후 세계에서는 지역과 국경의 구분이 무의미하다. 컴퓨터, 인터넷, 모바일 등 IT기술 발달은 무한한 가능성의 '덕후 월드'를 열었다. 온라인 네트워크로 덕후들은 언제 어디서든 소통할 수 있게 되고 자신의 덕력을 다른 덕후와 공유하며 시너지를 만들어낸다. 단순히 덕질 대상을 소비하고 향유하는 것에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콘텐츠를 재구성하고 창조한다. 그리고 그 콘텐츠는 생각 이상의 '고퀄'을 자랑한다.
대표적인 덕질 유발 사이트 디시인사이드는 덕후 입장에서 본다면 특정 대상에 애정을 쏟아낼 수 있는 흔치 않은 공간이며 자신들만의 놀이터다. 그 안에서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 정보를 나누고, 보닌이 제작한 콘텐츠를 공유하면서 능덕(능력자 덕후)도 되고, 덕업일치(덕질과 직업을 일치시키는 것)를 이루기도 한다.
우리 일상에서 떼놓을 수 없는 SNS도 마찬가지다. 트위터는 이미 덕후들이 마음 놓고 덕력을 과시할 수 있는 공간이 됐다. '좋아요' 하나로 게시물이 유통될 수 있는 페잉스북이나 해시태그로 취향을 공유하는 인스타그램은 직접 제작한 콘텐츠의 영향력을 시험하는 공간으로서 더할 나위 없다. 덕후들은 전방위로 즐겁고 창의적인 문화를 생산해내면서 그들의 시대를 이끈다.
생각해보면 언제 어디서나 덕후는 존재했다. '언어 덕후'였던 18세기 프랑스 학자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Jean-François Champollion)은 이집트 상형문자가 새겨진 로제타석을 세계 최초로 해석했다. '디자인 덕후'로서 스마트폰 혁명을 이끈 스티브 잡스의 디자인에 대한 집착과 덕력은 많은 사람이 인정하고 배우고 싶어 하는 성공의 자질이다. 이렇게 덕후는 시대의 진보를 이끌었다.
덕후들은 점점 다양한 곳에서 활약할 것이다. '휴덕은 있어도 탈덕은 없다'고 하지 않던가. 이들은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지는 않을 것이다. 각 브랜드도 덕후를 타깃으로 한 마케팅에 주력하고 있으며 대기업의 입사시험에서도 특정 분야의 전문가로서 덕후를 우대하고 있다. 덕후를 비정상으로 취급하던 시대는 지났다.
어쩌면 '구루'보다 '덕후'가 더 주목받는 세상이 된 건지 모른다. '인간은 누구나 무언가의 덕후'일 거라는 어느 작가의 말처럼 내 안에 잠자고 있는 덕심을 깨울 때다. 그리고 떳떳하게 덕밍아웃하자. "그렇다. 나는 세상을 바꿀 덕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