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신인섭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초빙교수
•현대경제일보(한국경제)/일요신문 광고부장
•희성산업(HS애드) 이사
• 한림대학교 객원교수/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초빙교수
•저서 : 한국, 중국, 일본 광고사, Advertising in Korea 등
1925년 8월 1일자 동아일보는 모두 압수당했다. 이유는 이 날짜 신문에 게재된 <개벽> 잡지 8월호 광고 때문이었다. 이튿날 동아일보는 압수된 광고와 함께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그림1>.
광고 게재 압수 (廣告揭載押收)
개벽 잡지의 광고를 게재하고 <개벽>이 압수되자 본보도 압수
조선서도 희유한 본보의 기화(奇禍)
별항과 같이 <개벽> 잡지가 발매 금지를 당하고 나아가 발행 정지의 비참한 운명에까지 이르는 한편으로 발매금지된 개벽 8월호의 광고를 게재한 본보 작일(昨日) 조간까지 발매금지를 당하고 말았는데 광고 까닭으로 압수를 당하는 때는 극히 드문 일로 얼마 전 시대일보가 풍속 괴란의 광고를 게재한 까닭으로 압수당한 일이 있었더라.
광고의 내용을 보면 ‘이역 풍상에 국궁진췌(鞠躬盡悴)하는 국사(國士)! 지사(志士)!’라는 작은 제목이 있다<그림 2>. 국궁진췌란 나라를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해 일한다는 뜻이다. 문제는 그 다음에 나오는 인물 소개이다. 12명의 독립투사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이동휘, 서재필 박사, 유동열, 이승만 박사, 김규식 박사, 안창호, 노백린, 남만춘, 이시영, 이동녕, 박은식, 신채호이다. 모두 한국 근세사에 나오는 저명한 인물들이다. 조선총독부에게 더욱 괴로운 것은 이런 기사를 쓴 필자의 이름이 나와 있는데 최 린, 김동성, 홍명희, 이광수, 한기악, 정인보, 변영로 등 역시 당대 명사들이었다.
지령 제708호
제호 개벽(開闢)
경성부 익선동 45번지
발행인 이두성(李斗星)
경성부 삼청동 52번지
편집인 이돈화(李敦化)
위 잡지는 안녕질서를 방해하는 것으로 인정되어 신문지법
제21조에 의해 그 발행을 정지한다.
대정(大正)14년(1925) 8월 1일
조선총독 자작(子爵) 재등 실(齋藤 實. 사이또 미노루) (인)
월간 <개벽> 잡지는 천도교계로서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항쟁이 그 기본 노선이었고 평등주의, 사회개조, 민족문화의 창달을 그 목표로 한 잡지이다. 이 8월호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조치는 가혹했다. 그림에 보이는 대로 잡지는 발행 정지를 당했다<그림 3>.
재빠른 조치였다. 다급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문화정치’의 한계가 어떤 것 인가를 잘 보여 준 사례이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가장 금기로 되어 있던 것은 ‘조선독립’이었으며 따라서 독립운동가에 대한 언급은 일절 금지되어 있었다.
발행정지의 근거가 된 신문지법은 1907년(광무 10년) 7월 법령 제1호로 제정된 것으로서 이 법은 이완용 내각 때 정부를 비판하는 언론에 대한 대책으로 제정된 것이었다. 흔히 광무신문지법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그 21조는 다음과 같다.
제21조(내부대신)은 신문지로서 안녕 질서를 방해하거나 풍속을 괴란한다고 인정하는 때는 그 발매 반포를 금지하고 이를 압수하며 그 발행을 정지 혹은 금지할 수 있다.
통치권자로서는 매우 입맛에 맞는 악법이었다. 원래 <개벽>은 1919년 3.1 독립운동 뒤 1910년에서 10년 기간의 무단정치 실패를 시정하기 위해 이른바 문화정치로 전환하면서 한국인에게도 신문, 잡지의 발행을 허가하는 일환으로 1920년 6월 25일에 탄생한 잡지였다. 물론 이때 발행 허가를 받은 신문 가운데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있고 그 외에도 한, 두 신문이 있었으나 중도에 폐간했다. 이 잡지사는 <개벽> 외에도 <어린이>, <조선 옹민>, <한생> 등 잡지도 발행했다<그림 4>.
1925년 8월호가 압수당하고 정간을 당한 1년 뒤인 1926년 8월에 <개벽>은 강제 폐간 당했는데 72호가 마지막이었다. <개벽>의 발행인 차상찬(車相瓚.1887-1946)은 지난 2010년 한국잡지협회가 주최하는 제45회 잡지의 날에 은관문화훈장을 추서 받았다. 그가 사망한지 65년 뒤의 일이었다.
[AD History] 압수당한 <개벽(開闢)> 잡지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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