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ulture] 버스킹만이 만들어내는 순수한 무대
무심하게 거리를 지나는 행인들 사이에서 낡은 행색의 남자가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른다. 이 노래에 반응을 보이며 그에게 말을 거는 한 여자, 영화 <원스>는 주인공의 버스킹으로 시작된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관객이 있는 곳에서 공연을 한다는 뜻의 ‘버스킹(Busking)’은 이제 무명의 아티스트 이외에도 보다 넓은 무대에서 관객을 만나고 싶은 기존의 스타들도 활용할 정도로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다. 그러나, 버스킹의 진정한 매력은 정식 무대에 오르기 힘든 인디 아티스트나 아마추어들이 무대에 대한 갈증을 풀고 자신만의 진정성을 아무 제약 없이 펼쳐 보일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아티스트는 많지만 그들이 올라설 수 있는 무대는 그 수요를 따르지 못한다. 이 공급과 수요의 불균형 사이에서 새롭게 떠오른 해결책이 바로 버스킹이다. 홍대 지역에서 활동하다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10센치도 거리 공연인 버스킹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장근석, 문근영이 주연을 맡은 <메리는 외박중>에서도 홍대 인디 밴드들이 버스킹 공연을 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버스킹 공연은 정식 무대에 비해 음향 장비나 조명 등 여러 가지 조건이 열악하다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은 정식 공연과는 다른 버스킹만의 신선하고 진정한 매력에 빠져들고 있다. 비슷비슷한 아이돌 음악에 흥미를 잃은 대중들이 그 대안으로 선택
하고 주목하고 있는 것이, 거리에서 만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음악이다.
순수하고 새로운 음악, 거리에서 듣자
독립영화 <원스>의 세계적인 성공은 버스킹 공연을 통해 한 뮤지션이 잃어버렸던 음악에의 열정을 되찾고, 스스로 더 큰 무대를 찾아 나선다는 성장담을 담고 있다. 관객들은 이 영화에 실제의 밴드 스토리가 깔려 있고,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점 이외에 별다른 기교나 화려한 무대 퍼포먼스 없이도 음악 그 자체만으로도 감동할 수 있고 순수한 교감을 나눌 수 있다는 점에 큰 매력을 느꼈다.
이런 버스킹을 통해 뮤지션으로 성장하는 밴드의 일화를 담은 영화가 한국에도 등장했다. 남다정 감독의 데뷔작인 <플레이>는 메이트라는 이름의 3인조 모던 록 밴드가 세계적 뮤지션 ‘스웰시즌’의 무대에 서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특별한 점은 허구가 아니라 실제 밴드의 일화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눈여겨볼 대목은 지난 2009년 영화 <원스>의 주인공 ‘스웰시즌’이 내한했을 때 일어난 특별한 에피소드를 영화 속에 담아 낸 것. 당시 서울 세종문화회관 로비에서 버스킹 공연을 하던 ‘메이트’를 본 ‘스웰시즌’의 멤버이자 영화 <원스>의 남자 주인공 역을 맡았던 글렌 한사드의 즉흥 제안으로 ‘스웰시즌’의 무대에 게스트로 서는 행운을 잡게 된다.
남다정 감독은 자신의 데뷔작에 밴드의 일화를 담은 이유를 ‘풋풋한 열정이 좋아서’라고 답했다. 이는 아마도 거리에서 자신의 음악만으로 관객을 만나는 버스킹 밴드들만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이 아닐까 한다. 무대와 관객석의 구분 없이 가장 가까운 곳에서 관객과 호흡하기에 그만큼 에피소드도 많고, 관객의 직접적인 지원과 애정으로 성장해가고 있다는 점에서 팬덤과도 더 끈끈한 유대관계를 자랑한다.
좋아서 하는 버스킹 문화
대한민국의 대표 버스킹 밴드로 불리는 이들이 있다. 밴드의 이름도 없이 공연하던 그들에게 관객들이 이름도 붙여주었다. 그래서 생긴 이름이 ‘좋아서 하는 밴드’이다. 이제는 각종 페스티벌에 초청되는 유명세를 누리고 있지만, 이 밴드의 시작은 이름도 없이 전국을 돌며 시작한 거리 공연이었다. 2009년에는 팬들의 도움을 받아 미니 앨범을 발매했으며, 어쿠스틱한 사운드에 담긴 진솔한 가사로 누구에게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좋아서 하는 밴드’만의 음악을 일반 대중에게도 선보였다. 작년에는 전국을 누비며 누가 불러주지 않아도 스스로 전국을 누비며 거리 공연을 하는 이들의 유쾌한 여정을 담은 <좋아서 하는 영화>를 제천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하기도 했다.
스스로를 알리기 위해, 혹은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선택하는 무대가 버스킹이지만, 누군가의 버스킹 무대는 또 다른 이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홍대 일대에서 버스킹 밴드로 유명한 ‘일단은 준석이들’이라는 2인조 밴드는 좋아서 하는 밴드와 10센치의 버스킹 공연을 보고 음악의 길을 선택한 이들이다.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그들은 버스킹 공연이 불러일으키는 교감의 장을 경험하고 과감하게 인디 밴드를 결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일단은 준석이들’은 연주할 수 있는 장소라면 가리지 않는다. 그들에게도 고민은 있는데, 버스킹 공연은 무조건 무료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서 유료 공연에 관객이 들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거리에서 그냥 보면 되는데, 뭐하러 돈 내고 공연장에 가냐는 생각을 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버스킹 공연은 원래 음악을 듣는 청중에게 자연스럽게 금전적인 대가를 요구한다. 작은 모자나 모금함을 두고 공연을 하는 모든 형태를 버스킹이라고 볼 수 있다. 인디 밴드라고는 하지만, 음악을 하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버스킹 밴드에게 관객의 호응과 적극적인 지원은 이 거리 문화를 계속 풍부하게 이어나가는 필수 조건이 된다. TV에서는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는 이 밴드들의 독창적인 음악을 마음껏 즐겼다면, 그에 대한 대가를 당연하게 여기는 거리 관객의 문화도 꼭 필요한 부분이다.
또 다른 무대로의 도약
버스킹으로 시작한 밴드들의 성공은 이제 공식적인 무대로도 그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다. 해마다 가을에 열리는 그랜드 민트 페스티벌(Grand Mint Festival)은 페스티벌의 오프닝 무대로 ‘버스킹 인 더 파크’를 마련한다. 본 공연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무대의 이름을 ‘버스킹’이라고 명명한 것 자체가 특이하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음악 페스티벌의 오프닝으로 버스킹 밴드만을 위한 무대를 마련했다는 것은 그만큼 이들에 대한 관객의 호응도가 높고, 그들의 음악을 높이 평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버스킹 밴드들은 거리에서만 공연하기를 고집하는 밴드들이 아니다.
그들은 쉽게 열리지 않는 기존의 무대를 기다리지 않고 대안으로 새로운 무대를 만들어낸 사람들일 뿐이다. 그러나 이 거리에서 살아남은 밴드들은 공중파 등의 무대로 진출한 이후에도 거리 공연에서 얻을 수 있었던 에너지와 뜨거운 교감을 잊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래피티 아트, 스트리트 패션 등과 함께 오랫동안 거리 문화의 한 축을 담당해왔던 버스킹 공연이 지금 대한민국 청춘들의 지지를 얻는 배경에는 기존 무대와 뮤지션에 대한 실망감도 한몫 거들고 있다고 말한다. 새로운 무대는 단순히 공간의 확장이 아니다. 새로운 무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음악이 만났을 때, 이 작고 초라해 보이는 거리 공연은 화려한 무대를 이길 수 있는 뜻밖의 힘을 얻기도 한다.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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