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당당하라! 호모 야누스(Homo Janus)여!
서울다씨 김태흥 국장
Pepsi Twist – 레몬과의 키스 French Café – 악마의 유혹 Windsor 12 – 거부할 수 없는 유혹 기타 수없이 많은 아리따운 여성들을 등장시켜 섹스 어필을 하는 카피들
누구나 자신만의 스타일로 성적인 판타지를 갖고 있을 것이다. 상황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때로는 로맨틱하게, 때로는 에로틱하게. 물론 이것이 본인의 의지에 따라서 만들어진 것인지, 주위 환경과 상황이 조장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워낙 다양한 요소들이 만들어 내거나 영향을 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 됐건 누구에게나 성적인 판타지가 있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판타지이기 때문에 현실 생활에서 쉽게 접근하기 힘든 것 또한 사실이다. 사람들 마음 속에서 정확한 소구점을 찾아내야 하는 광고는 그런 점에서 성적인 판타지를 언급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것 같다.
이러한 성적인 판타지를 자극하는 광고류의 맥을 잇는 작품이 최근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다. 바로 비달사순 익사이팅 헤어의 새로운 TV CM이다. 반대편 플랫폼에 서 있는 남자 친구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지하철이 지나가는 동안, 옆에 서 있는 낯설지만 매력적인 남자와 키스를 나눈다. 그리고 나서 ’’아무일 없던 것처럼 감쪽같이 되돌아오고’’ 정신 못 차리는 남자와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 친구를 비웃는 듯이 여자가 뒤돌아 보며 미소를 짓는다. 정말 감쪽같다. 마치 동물의 왕국에서 여우가 사냥하기 전에 보이는 완벽한 시치미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여우, 여시, 왕내숭, 호박씨... 더 이상 떠오르는 말도 없다. ’’너무하는 것 아냐?’’ 그런데도 당돌하다 싶을 정도로 대담하고 자신만만한 여자의 행동, 그리고 그녀가 한 눈에 쏙 들어온다. 눈에 들어오는 정도가 아니라 기억 속에 확실히 한 자리 차지한다. 여자들이 상상하는 판타지란 저런 것인지. 여성이기에 가능한 성적 판타지, 여성의 입장에서 서술되는 판타지. 낯설기 때문에 오히려 강렬히 기억되는 새로운 접근 방식이다.
요즘 들어 당찬 여성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광고들이 많아지긴 했지만 여성들의 성의식을 엿볼 수 있는 광고는 없었던 것 같다. 최근의 펩시 트위스트 광고만 하더라도 여자가 콜라를 뺏기 위해 도둑 키스를 감행하지만 여성의 성의식을 읽어내기는 힘들다. 오히려 여유있는 남자의 모습에서 남성 중심의 판타지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하지만 비달사순의 광고는 여성의 성의식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낯선 남자에게도 성적인 매력을 느낄 수 있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애인인 ’’단 한 사람’’ 앞에서는 요조 숙녀가 되고 싶고 그 맘을 들키고 싶지 않다. 매우 이율배반적이긴 하지만 오히려 당당하고 그 여자의 모습에 심리적으로 동조하게 된다. 이율배반적이라고 하면서도 내가 동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렇게 당당한 여자를 등장시킴으로써 진정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무엇일까?
진화심리학이 이 부분에 대해서 훌륭히 설명해주고 있다. 진화심리학은 사람의 마음도 몸처럼 진화의 산물이라고 간주한다. 이를테면 사람의 마음은 인류의 조상이 수렵 채집 생활을 하던 시절부터 생존을 위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자연 선택된 기능들이 모여서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의 성심리에 대해선 생물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종족의 번식이며 이를 위한 상대방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남성의 거의 무한에 가까운 생식력과 거의 일년에 한 번만 수태가 가능한 여성의 생식력을 비교해 봐도 두 집단의 차이는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 결과 여성은 자신을 보호하고 아이를 기르는데 있어 필요한 재산을, 남성은 자신의 종족을 퍼뜨리기 위한 생식적 가치를 중요시하면서 진화는 계속된다. 양성의 이와 같이 상반된 입장의 차이는 결국 짝짓기를 위한 전략, 즉 성 전략에 있어 두 가지를 고려해야 할 필요성을 낳게 된다. 즉, 여성의 입장에서는 이상적인 남성을 찾아야 한다는 점과 그 남성에게 호감을 얻을 수 있도록 자신을 가꿔야 한다는 점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남성의 경우에도 젊고 건강한 여자를 찾는 동시에 여성에게 인정 받을 수 있도록 신뢰감을 주어야 한다. 즉 자신의 관점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관점까지도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서로 독립적이고 자율적이었던 두 개체가 새롭게 관계를 맺어가기 위해서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 듯 하다.
이러한 이중적이고 애매모호한 상황이 우리네 삶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사랑 문제로 좁혀 생각해 봐도 그렇다. 자기만 좋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전전긍긍, 이런 저런 고민 다하면서 평생에 가장 활발한 뇌활동을 보이지 않는가 싶다. 어쨌든 인간은 상대방을 고려하는 이중적인 성 전략을 쓰는 수 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종족 번식이라는 학술적인 단어는 제쳐두고서도 평생 데이트 한 번 하기 힘들지 않겠는가!
이런 면에서 인간이란 종에게 하나의 학명을 더 부여할 수 있을 것 같다. Homo Janus. 수많은 사람들과 수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은 자신의 가치를 지켜가는 동시에 타인의 가치 역시 고려해야 하는 숙명을 지녔다. 그 속에서 자신의 전략을 짜고 헤쳐나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다면적인 모습을 동시에 간직하고 또 드러내 보이는 것이 바로 인간, 호모 야누스이다. 자연스러운 인간의 이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편견에 빠지는 길이 아닐까? 사랑에 있어서도, 성에 있어서도 인간은 그러한 이중성을 갖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지고지순하고 헌신적이고 깨끗한 사랑을 꿈꾸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고 있는 판타지이리라. 장주가 꾸었던 꿈처럼 우리는 어느새 자연스러운 우리의 성 본능을 판타지라 생각하고 있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비달사순 광고 얘기로 돌아가보자. 광고 속에서 인상적인 대담함을 보여줬던 그녀. 그녀의 모습은 호모 야누스적인 인간의 본성을 잘 집어냈다. 그리고 그것에 은근히 얼굴이 달아오르면서도 심적으로 동조하는 우리는 광고가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를 정확히 받아들인 셈이다. 누구의 마음 속에나 존재하는 성본능을 그린 것이 사실은 판타지가 아니라 우리 마음 속의 현실이라는 사실을. 당당하게 자신의 성본능을 보여주는 그녀의 행동은 우리들이 만들어낸 잣대에 의하면 일탈된 행동이겠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욱 자연스러운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을. 그녀가 마지막에 남긴 웃음을 생각하면 부러움과 부끄러움이 동시에 든다. 당당히 자신을 밝히는 그녀의 웃음에 부러움을 느끼고 그렇게 살지 못하는 나를 비웃고 있기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보다 당당하게 내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다. 당당하게 살자! 호모 야누스의 자손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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