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했던 여름이 갔다. 엄밀히 말하자면 여름은 짧았고 우기는 길었다. 줄기차게 내리는 스콜성 폭우는 내게 여름을 뺏어갔다. 여름은 젊음의 계절, 여름은 맥주의 계절이다. 그래, 이놈의 비가 여름 밤, 일과를 마치고 맥주 한 잔하는 내 즐거움을 송두리째 앗아간 것이다. 나쁜 비, 서운한 여름.
나는 맥주 애호가다(다른 술들이 서운해할지도 모르지만 ‘미안해 얘들아, 사실은 맥주가 내 퍼스트야’). 내 첫사랑도 맥주였고 즐겨 찾는 애인도 맥주인 셈이다. 처음으로 마신 술을 기억해 보면 고등학교 2학년 경주에서 만난 그녀, OB맥주다. 허리띠를 이어 아래층 슈퍼마켓 아저씨와 내통한 경주의 수학 여행 그 밤. 난 금녀의 방안에 그녀를 불러들인 것이다. 순수의 청(소)년은 3초의 음미는커녕, 3초 후 알딸딸, 3분 후 만취였다. 그래도 못 잊는 알싸함. 내 기억의 첫 만남에는 그런 추억이 남아 있다.
맥주는 가볍게 마시는 술이다. 그래서 자주 마시고 그래서 두주불사(斗酒?辭), 이 몸도 맥주를 사랑하게 됐다. 마트를 가서 아내와 장을 볼 때 소주를 박스로 사면 매우 혼난다. 그런데 맥주를 박스로 사자고 하면 물병이 벌크로 붙어 있네, 땅콩캔 안주가 덤으로 오네 하면서 골라준다. 또 자유로운 정신세계를 갖고 있는 이들이 모여 일하는 동네인지라, 디자인 할 때, 영상편집 할 때, 촬영 할 때, 잘 안 풀리면 맥주 한 캔 들고서 홀짝거리며 진행한다. 소주 한 병 들고 홀짝대면 다들 놀라겠지만,맥주 한 캔 들고 있으면 한 모금 달래는 사람, 꼭 있다.
해외 출장지에서도 일과 뒤 마무리는 맥주 한 캔이다. 호텔 숙소에서 뭐라 하는지도 모르는 자국방송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마시는 맥주 맛은 그야말로 일품.
맥주 맛은 알싸한 감동이 있어야 한다. 음… 이거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한마디로 한 모금 마시고 나서 ‘꺼억~’보다는 ‘캬~!’하는 감탄이 나와야 한다. 그리고 한 캔 정도는 안주가 없어야 맛있다. 이 정도까지 호응이 되시면 덧붙여 원샷! 영어로 하면 보름섭(Bottoms up)!하셔야 한다. 이 삼박자가 내 기호엔 가장 맛있게 마시는 맥주 한 캔이다.
그런데 최근, 내 잃어버린 맥주의 즐거움에 불을 땡긴 광고가 보였다. 추적추적 비 내리는 여름밤에도, 귀뚜라미가 매미처럼 크게 짖어대는 요즘 가을밤에 공유가 나왔다. 보기에도 시원한 분수의 앞 열에서 장엄히 원샷을 해대신다. 언제 제대했나 싶을 정도의 적당히 긴 헤어스타일로 안주 없이“캬~!”를 외치신다. 그 이름도 돋는 OB맥주를 제대로 들이키시며 텔레파시를 쏘신다. ‘들어봤나! OB골든라거?’요즘 한 돈에 25만원씩이나 하는 금인데, 이 맥주는 그 이름도 골든라거!
3초를 음미하라는 카피는 3초 안에 사서 마셔봐!라고 하는 듯하다. 이미 TV속에 1. 2. 3 숫자가 지날 때마다 마음속으로 따라하는 내 가슴이 벌렁댄다. 공유랑 같이 하나, 둘, 셋 하며 원샷! 하지만 더 이상 맹물을 같이 들이킬 순 없다. 이제는 선택할 시간, 참을 때로 참았다.
이번 주말엔 반드시! 다 죽었어. 골든라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