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탁 프로 | 인터랙티브 제작그룹 CD
이번에도 허겁지겁 인천공항을 향해 내달렸다.
언제나 출장 전엔 남은 일을 마무리해 놓고 가기 위해 목까지 찬 일에 캑캑대다가
한 숨 토해낼 틈도 없이 공항으로 달린다. 출장지에 가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한 숨 토해낼 틈도 없이 공항으로 달린다. 출장지에 가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도착하자마자 현지 프로덕션과의 미팅이 이루어진다.
먼저 모델과 의상을 체크하고 다음날부턴 로케이션 점검을 떠난다.
파김치가 되어 돌아와 침대에 몸을 던지면 아뿔싸!
바로 그 다음날부턴 촬영시작이다.
바로 그 다음날부턴 촬영시작이다.
해가 뜰 때부터 촬영이 시작되기에 거의 언제나 새벽 5시면 기상해서 호텔을 나선다. 하루 촬영을 마치고 다시 파김치가 되어 호텔에 돌아오면 컨펌해야 할 일들이 이메일에서 우두둑 쏟아진다. 서울과의 통화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이후 모든 일정을 마치곤 다시 허둥지둥 짐을 싸서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수많은 일들이 또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수없이 해외 촬영을 다녔지만 상황은 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분명 문제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아마도 다른 대부분의 직장인 역시 살인적인 스케줄의 일상을 살아내고 있을 것이다.
왜 우리는 늘 시간에 쫓기며 이 같은 패턴을 반복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시간의 독재에서 풀려 날 수는 없는 것일까?
현대인들이 점점 더 시간에 쫓기며 여유 없는 일상생활을 영위한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재미있는 실험이 있었다. 같은 장소의 20m의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들의 걸음속도를 측정해 본 결과 1998년보다 2008년의 사람들의 걸음속도가 10% 빨라졌다는 것이다. 10년 전보다 10%만큼 더 시간의 압박을 느끼고 있다는 얘기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우리는 일상에서‘시간에 쫓긴다 (Running Out of Time)’‘시간을 벌었다(Saving Time)’와 같은 표현을 아주 자연스럽게 쓰고 있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이는 아주 우스꽝스러운 표현이다. 시간은 그저 의연하게 흘러가고 있을 뿐이다. 시간이 우리를 쫓은 적이 없다. 우리가 그렇게 느낄 뿐이다. 그리고 시간은 돈처럼 적립해 둘 수 있는 존재도 아니다. 이처럼 우리가 시간을 소유의 대상으로까지 표현한 것은 본격적인 산업화와 자본주의 사회가 도래하면서 이루어진 현상이다.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생산해 내고 교환시켜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시간을 의식하고 시간에 자신을 맞춰 살게 된 것이다.
시간은 결코 우리를 구속한 적이 없다. 우리 스스로 구속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을뿐이다. 불과 150여 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시간에 얽매어 살지 않았다고 한다. 시계를 들여다 보는 행위도 찾아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해 뜨면 밭 매고, 해 지면 허리 펴고 집에 돌아오는 자연의 섭리에 따라 생활했을 것이다. 1830년 영국의 한 공장에서는 공장건물에 큰 시계를 달았는데, 노동자들이 시간이 영혼을 잠식한다고 부셔버렸다고 한다. 이제 그 공장의 큰 시계는 사람 손목의 작은 시계로 대체됐고, 현대인들은 마치 편집증 환자처럼 더더욱 시간을 의식하는 삶을 살고 있다.
30대 중반까지 나는 마치 무엇에 홀린 듯 대한민국 구석구석을 여행 다녔었다. 한 때는 선사시대 암각화에 매혹되어 경남 울주에서 경북 고령 사이를 오갔고, 어떤 때는 공룡 발자국과 화석을 찾아 경남 고성과 전남 해남을 싸돌아 다녔었다. 태백에 있는 한강 발원지 검용소를 찾아 몇 십리 길을 걸어 오지로 흘러 들기도 했고, 백두대간이란 용어가 대중화되기 전에 백두대간을 타기 시작했다. 용늪, 왕등재늪, 천성산늪 등 지구의 가장 오래된 지형이라는 습지를 찾아 떠돌기도 했고, 야생화를 찾아 곰배령을 비롯 여기저기를 기웃대기도 했다.
그렇게 오지를 떠돌 때마다 내가 부딪친 것은 시간의 문제였다. 하루 사이에 나는 20세기와 공룡이 서식하던 6500만 년 전을 오고 갔던 것이다. 신석기 시대의 추상문형과 신라시대 화랑들이 새긴 글귀가 나란히 박혀 있는 천전리 암각화 앞에서는 수평으로 흐르던 시간이 수직으로 멈춰 선 느낌을 받기도 했다. 시간이란 어딘가로부터 흘러와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흘러가 버리다 잠시 나를 스치는 바람과 같은 존재처럼 느껴졌다. 결코 내가 소유할 수도, 나를 소유할 수도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요즘 들어 슬로우 라이프(Slow Life)란 말이 자주 회자되고 있다. 고속질주했던 삶에 저속기어를 넣어 보자는 것이다. 특히 일중독인 한국인들은 한 번쯤 되돌아 봐야 할 덕목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속질주 덕분에 목적지엔 빨리 왔지만 그 롤러코스터 속에서 우리는 너무 지치고 피곤했다. 빠른 경제 성장과 고도의 산업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속도전은 필요하다. 우리는 그 속도전을 통해 오늘날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선진국의 호적에 등재되어 G20 정상회의와 같은 전 세계의 유지를 초대한 행사를 개최하는 주빈국으로서 이제는 우리의 삶의 질을 돌아볼 필요도 있다고 생각된다.
속도전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해진‘안되면 되게하라!’는 가치관으론 아이디어와 소프트웨어 중심의 무림에서 버텨내기 힘들 것이다. 요즘도 거의 분 단위의 스케줄에 정신을 놓칠 때면 10여 년 전 강원도 임계의 산판길에서 마주쳤던 산소년을 떠올리곤 한다. 원시의 햇빛을 온 몸에 받아 온 것처럼 느껴지던 그 소년은 24시간 중 어디에 속해 살고 있는 것일까? 아니 24시간이라는 인간이 재단해 놓은 시간 단위 자체가 의미가 있기나 한 걸까…?
손목 위의 시계를 풀어 서랍에 넣어 두도록 하자.
왜 우리는 늘 시간에 쫓기며 이 같은 패턴을 반복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시간의 독재에서 풀려 날 수는 없는 것일까?
현대인들이 점점 더 시간에 쫓기며 여유 없는 일상생활을 영위한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재미있는 실험이 있었다. 같은 장소의 20m의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들의 걸음속도를 측정해 본 결과 1998년보다 2008년의 사람들의 걸음속도가 10% 빨라졌다는 것이다. 10년 전보다 10%만큼 더 시간의 압박을 느끼고 있다는 얘기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우리는 일상에서‘시간에 쫓긴다 (Running Out of Time)’‘시간을 벌었다(Saving Time)’와 같은 표현을 아주 자연스럽게 쓰고 있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이는 아주 우스꽝스러운 표현이다. 시간은 그저 의연하게 흘러가고 있을 뿐이다. 시간이 우리를 쫓은 적이 없다. 우리가 그렇게 느낄 뿐이다. 그리고 시간은 돈처럼 적립해 둘 수 있는 존재도 아니다. 이처럼 우리가 시간을 소유의 대상으로까지 표현한 것은 본격적인 산업화와 자본주의 사회가 도래하면서 이루어진 현상이다.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생산해 내고 교환시켜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시간을 의식하고 시간에 자신을 맞춰 살게 된 것이다.
시간은 결코 우리를 구속한 적이 없다. 우리 스스로 구속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을뿐이다. 불과 150여 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시간에 얽매어 살지 않았다고 한다. 시계를 들여다 보는 행위도 찾아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해 뜨면 밭 매고, 해 지면 허리 펴고 집에 돌아오는 자연의 섭리에 따라 생활했을 것이다. 1830년 영국의 한 공장에서는 공장건물에 큰 시계를 달았는데, 노동자들이 시간이 영혼을 잠식한다고 부셔버렸다고 한다. 이제 그 공장의 큰 시계는 사람 손목의 작은 시계로 대체됐고, 현대인들은 마치 편집증 환자처럼 더더욱 시간을 의식하는 삶을 살고 있다.
30대 중반까지 나는 마치 무엇에 홀린 듯 대한민국 구석구석을 여행 다녔었다. 한 때는 선사시대 암각화에 매혹되어 경남 울주에서 경북 고령 사이를 오갔고, 어떤 때는 공룡 발자국과 화석을 찾아 경남 고성과 전남 해남을 싸돌아 다녔었다. 태백에 있는 한강 발원지 검용소를 찾아 몇 십리 길을 걸어 오지로 흘러 들기도 했고, 백두대간이란 용어가 대중화되기 전에 백두대간을 타기 시작했다. 용늪, 왕등재늪, 천성산늪 등 지구의 가장 오래된 지형이라는 습지를 찾아 떠돌기도 했고, 야생화를 찾아 곰배령을 비롯 여기저기를 기웃대기도 했다.
그렇게 오지를 떠돌 때마다 내가 부딪친 것은 시간의 문제였다. 하루 사이에 나는 20세기와 공룡이 서식하던 6500만 년 전을 오고 갔던 것이다. 신석기 시대의 추상문형과 신라시대 화랑들이 새긴 글귀가 나란히 박혀 있는 천전리 암각화 앞에서는 수평으로 흐르던 시간이 수직으로 멈춰 선 느낌을 받기도 했다. 시간이란 어딘가로부터 흘러와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흘러가 버리다 잠시 나를 스치는 바람과 같은 존재처럼 느껴졌다. 결코 내가 소유할 수도, 나를 소유할 수도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요즘 들어 슬로우 라이프(Slow Life)란 말이 자주 회자되고 있다. 고속질주했던 삶에 저속기어를 넣어 보자는 것이다. 특히 일중독인 한국인들은 한 번쯤 되돌아 봐야 할 덕목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속질주 덕분에 목적지엔 빨리 왔지만 그 롤러코스터 속에서 우리는 너무 지치고 피곤했다. 빠른 경제 성장과 고도의 산업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속도전은 필요하다. 우리는 그 속도전을 통해 오늘날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선진국의 호적에 등재되어 G20 정상회의와 같은 전 세계의 유지를 초대한 행사를 개최하는 주빈국으로서 이제는 우리의 삶의 질을 돌아볼 필요도 있다고 생각된다.
속도전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해진‘안되면 되게하라!’는 가치관으론 아이디어와 소프트웨어 중심의 무림에서 버텨내기 힘들 것이다. 요즘도 거의 분 단위의 스케줄에 정신을 놓칠 때면 10여 년 전 강원도 임계의 산판길에서 마주쳤던 산소년을 떠올리곤 한다. 원시의 햇빛을 온 몸에 받아 온 것처럼 느껴지던 그 소년은 24시간 중 어디에 속해 살고 있는 것일까? 아니 24시간이라는 인간이 재단해 놓은 시간 단위 자체가 의미가 있기나 한 걸까…?
손목 위의 시계를 풀어 서랍에 넣어 두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