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니들이 고생이 많다~"
Cheil Worldwide, 2009년 05월, 400호 기사입력 2009.06.24 12:00 조회 6748
새로운 아이템 발굴을 위해 엄한 머리털 쥐어뜯고, 빨간펜을 굴리며 다크서클을 훈장인양 달고 다니고, 인쇄사고 난 날 밤 꿈에 등장한 오타의 환영에 끙끙대 본 경험! 여러분의 눈 앞에 펼쳐진 사보 뒤에서 남모르게 뛰고 달렸을 누군가에 관한 이야기랍니다.

오늘 이 자리에 그‘누군가’가 한꺼번에 모여 사보에 관한 수다 한 보따리를 풀어놓을 겁니다. 어제와 오늘, 내일의 제일기획 사보를 만들기 위해 바통터치해 온‘7인의 사무라이’아니, ‘7인의 사보 담당자’들이 말이죠. 창간 400호를 축하하신다면, 사보를 통해 꿈을 키워온 독자분들이시라면, 짝짝짝~ 그들에게 진심 어린 박수를 보내는 것도 꽤 괜찮은 생각일 것 같습니다.



일시 2009년 4월 22일 pm 6시 30분
장소 제일기획 11층 i-Cafe
참석자 박정희(전 PR팀, 현 유니PL 대표, 1983년부터 1985년까지 사보담당)
             
김희라(전 홍보팀, 국어교사, 1995년부터 1997까지 사보담당) 
              
정서린(전 프로모션 CR팀, 서울신문 기자, 2004년 사보담당) 
             
김형철(현 재무팀 국장, 1993년부터 1995년까지 사보담당)
             
이주미(현 프로모션 제작팀 국장, 1997년부터 2000년까지 사보담당) 
사  회   장숙현(현 홍보팀 사원, 2006년부터 사보담당 중)

사회 대담이라니까, 왠지 긴장되시죠? 오늘 우리가‘100분 토론’식의‘제일기획 사보, 이대로 만들어져도 되는가’‘앞으로 나아갈 사보의 발전 방향’같은 어려운 대화를 나눌 건 아니니 걱정 마세요. 눈물 없인 들을 수 없는 20세기 사보 담당자의 고생담,‘ 지금은 말할 수 있다’ 식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자유롭게 들려주시면 됩니다. 자자, 선배님들~ 긴장 푸시고요, 사진 촬영을 위해 말씀하시다 가끔 웃어주는 센스도 발휘해 주시길 바라면서! 먼저, 다들 언제 어떻게 사보 담당자가 되신 건가요?

박정희 제가 제일기획에 입사한 게 1982년 5월이었어요.

사회 제가 거의 태어날 때 쯤이네요(웃음).

박정희 그런가요? 그 해 제일기획에 새로운 조직 변화가 있었는데, 88올림픽을 대비해 프로모션국이 생겨나면서, 마케팅부?옥외매체부?홍보부가 새롭게 구성됐어요. 전 홍보부 경력직으로 입사해 사보가 마케팅부에서 홍보부로 넘어오면서 사보 일을 하게 된건데, 음, 지금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사보가 주 담당이었던 사람들이네요. 난 그냥 곁다리로 낀 건데. 대외홍보가 주된 업무였고, 사보는 2년 정도 옆에서 거든 거에요.

김형철 전 1993년 홍보팀 신입으로 입사했어요. 당시 홍보팀에서는 방송?출판?대외PR 업무를 진행하고 있었고, 전 PR겸 사보 담당이었죠. 지금도 생생한 기억 중 하나가, 신입이라 어리버리한 상황에서 사보기획사가 있던 충무로에 처음으로 갔었는데, 그 곳 사장님께서 도화지에 글자를 쫙(정말 어마하게 많이) 붙여두고 교정을 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위에 습자지를 붙여놓고 체크하면서 일일이 교정 보느라 진땀 좀 뺐었죠.

김희라 김형철 선배님은 제 사수셨어요. 선배님께서 특별히 뽑아주셔서 2년 2개월 동안 사보 만드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어요.

김영철 그 때 김희라 씨, 진짜 쟁쟁한 경쟁자들을 떨치고 입사한 케이스예요. 입사 원서 낸 사람 중에서 프랑스 유학파도 있었는데 말이죠.

김희라 아~ 그런 놀라운 비화가! 진짜 그 때 사보담당 지원자 경쟁이 치열하긴 했죠. 전 출판쪽에 늘 관심이 있어서 대학시절에 과지, 학회지도 만들고 그랬거든요. 우연히 뽑힌 건 아니란 말씀이죠.

정서린 선배님들 말씀 들으니, 제가 넘 쉽게 사보 만드는 영광을 차지한 것 같은데요. 전 2002년 인재제일 10기 학생기자 출신이에요. 원래 언론사를 지망하고 있었는데, 제일기획 사보를 맡으면 기획력도 늘고, 미디어나 언론매체도 많이 접할 수 있을 것 같아 지원한 거죠. 사보를만드는 내내 특집 기획하는 일이 어려웠던 기억이 나요.

사회 선배님도 그러셨어요? 저도 사보를 만들면서 특집 칼럼의 주제를 정하고, 그에 맞는 필자를 찾는 일이 제일 어렵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궁금하네요. 혹 선배님들께선 필자를 찾는 자기만의 노하우가 있으셨는지, 애정이 가는 칼럼이나 기억에 남는 필자 분이 있으신지.

박정희 우리 때는 뭐 노하우도 없었고, 뭐 필자 찾는 건 쉬웠죠. 왜냐, 이 분야 관련 전문적인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손에 꼽힐 정도였으니까요. 당시 광고회사가 고작 세 군데였는걸요. 광고학과는 2~3개! 그래서 대부분의 필자는 사내 필자를 많이 활용했어요. 당시 사내 직원이 150여 명 정도였는데, 보통 그 정도 숫자면 다 알잖아요. 원고청탁을 해도 다 아는 사이끼리 뭐 어렵겠어요. 청탁하기도 쉬웠죠.

김희라 하하, 전 필자 소개해 달라며 주위 선배님들을 진짜 많이 괴롭혔던 것 같아요. 그리고 최인아 전무님은 진정한 의미의‘좋은 필자’셨죠. 내용 좋아 감탄 나오죠, 오문 없이 완벽하게 정리해 주시니, 조사 하나 손 볼 것 없이 인쇄 과정으로 고고! 사보 담당자에게 이보다 좋은 필자가 어디 있겠어요?

정서린 일정 기간 같이 일하다 보면 친해지게 되잖아요. 전 대개의 필진들이 30~40대의 아저씨들이라, 애교 작전으로 독촉하기도 했어요. 잘 먹히진 않았지만요(웃음). 대부분 현업에 계신 분들이라 미루면서도 미안해하고, 저도 독촉하면서도 미안하고 뭐 그랬어요. 다들 공감가시죠?

모두 (끄덕끄덕)그럼요!

사회 예전엔 지금처럼 사보를 만드는 과정이 디지털화되지 않아서 힘든 과정들이 많았을 것같아요. 특히 타블로이드 판은 어떻게 만드셨는지 궁금해요.

박정희 그 때 타블로이드 판 만들며 고생했던 걸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아마 지금 담당자들은 상상도 안될 걸요. 우선 판 만드는 방법이 전혀 달라요. 인쇄는 크게 활판인쇄와 옵셋인쇄 두 가지 방식이 있는데, 옵셋인쇄는 처음엔 흰 종이에 타이핑을 해서 활자를 찍는‘청타’라는 방식이었다가, 이후 글자판을 렌즈로 비춰 빛을 투과시켜서 인화하는 사진식자(사식) 방식으로 바뀌었어요.

청타는 글자 크기가 고정인 반면, 사식은 글자의 크기나 형태를 마음대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게 큰 차이죠. 주로 청타로 쭉 쳐놓고, 변경이 필요하면 사식을 쳐서 붙이는 일을 했어요. 흔히 말하는 대지작업이죠. 요즘은 뭐 컴퓨터에서 아주 쉽게 다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 때는 그렇게 일일이 대지작업을 한 뒤 필름을 만들었어요. 이런, 활판에 대해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건가?

이주미 전 대학 신문 실습 시간에 활자 한 글자 한 글자를 뽑아 활판 만들어 봤어요.

박정희 아 그래요? 나만 구식인 줄 알았는데, 그나마 반갑네.

김형철 저도 견학 가서, 할아버지들이 돋보기 안경 쓰시고 활자를 일일이 뽑는 작업을 하고 계시는 거 본 일이 있어요.

박정희 한 글자 한 글자 뽑아서 활판을 짠 다음엔, 거기다 잉크를 묻혀서 프린팅을 해야 해요. 근데 이게 시간이 제법 오래 걸려요. 마감 날짜 임박했을 땐, 옆에서 지켜보다 활판 하나가 완성되면, 그걸 바로 들고 프린트 집으로 직행하는 거지. 급한 마음에 뛰다 넘어져 쏟으면 활판을 새로 다 만들어야 해요. 밤새도록 서 있다 그런 일 한 번 당하면 진짜 눈물 나죠.

하나 기억나는 에피소드는, 언젠가 용산의 어느 작은 인쇄소에서 작업을 하는데 그 집엔 사식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일일이 손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오려서 샘플들을 활판으로 인쇄하고, 또 그걸 일일이 자르는 작업을 했죠. 최첨단인 광고회사에서 이렇게 하는게 의아했는데 경비를 절감하기 위한 방법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사회 아, 그 때도‘경비의 압박’은 있었군요(웃음). 듣다 보니, 선배님들께도 잊지 못할 추억의(?) 교정사고, 인쇄사고 하나씩은 있으실 것 같은데요. 광고주의 수정 요청이라든지, 기억에 남는 일 없으세요?

정서린 언젠가 제일기획 광고주의 경쟁사가 연상되는 사진과 카피가 사보의 표4면에 실린 적이 있었어요. 담당 광고팀에서 찾아와 어찌나 화를 내시던지. 물론 저희가 잘못한 부분이었죠. 회사 내에서 어떤 광고가 진행되고 있는지 미처 다 파악을 못한 거니까. 전 그 때 정말 많이 당황했었는데, 당시 선배님들께서 신속하게 대처해 주셨던 기억이 새록새록….

사회 그래서 어떻게 하신 거예요?

정서린 재인쇄를 하는 걸로 마무리 됐죠.

김형철 아, 재인쇄…. 재인쇄하니 저도 생각나네요. 제 경우엔 광고주가 사명을 바꾸는 시점이었는데, 그만 그 사실을 놓쳐 이전 사명이 책에 실린 거죠. 이미 인쇄 끝나고 발송도 됐는데 재인쇄를 들어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하루 종일 고민했던 것 같아요. 결국 사내 배포용만이라도 수습하려고, 테이프를 만들어 몇 백부를 밤새 붙였어요. 왜 가끔 TV 드라마에도 나오잖아요. 예쁘고 잘생긴 후배나 상사와 함께 밤새 작업하다 사랑이 싹튼다는 게 좀 다르지만. 현실은, 아시죠? 그냥 죽어라 혼자 하다 목 디스크 생길 지경이라는 거.

김희라 저는 성격이 꼼꼼한 편이라….

김영철 하하 정말? 언제 그랬어요?

김희라 선배님께서 잘 모르시나 본데, 꼼꼼한 사람이 원래 작은 걸 잘 보고 큰 걸 좀 놓쳐요. 본문만 열심히 보고, 제목의 오타를 놓친다거나. 한 번은 인쇄 직전에 제목에 오타가 난 걸 발견하고 얼마나 놀랐던지. 무려 4000부를 재인쇄할 뻔 했거든요. 지금도 재직 중인 학교에서 교지를 맡고 있는데, 최근 교장 선생님 함자 중‘홍’을‘흥’으로 오타 낸 거예요. 어떻게요, 밤새 점 찍었죠, 뭐.

이주미 이건 좀 딴 얘기긴 한데…. 사보를 맡으면서 전해 듣기로 사보 담당 포토그래퍼가 참 잘 생겼다는 거예요. 그 땐 TV광고물을 모니터에 틀어놓고 정지 스틸을 일일이 사진촬영을 해야해서, 담당 포토그래퍼가 있었거든요. 어느 날 그 포토그래퍼가 긴 머리를 휘날리며 왔는데, 정말 잘생겨도 너무 잘생긴 거예요. 우리가 촬영 컷을 이것저것 요청하면“네”하고 짧게 대답하는 것도 멋지고.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람이 연예계 데뷔 전의 지진희 씨였어요.

정서린 와, 좋으셨겠다.

사회 늘 처음이 가장 기억에 남고 뜻 깊게 느껴지기 마련인데요, 작업하셨던 사보의 첫 작품이 나왔을 때의 느낌 기억나세요?

김형철 처음으로 작업한 사보도 사보지만, 제일 기억에 남는 작업은 현재‘아트와 카피의 행복한 결혼’칼럼의 전신인‘해외 그래픽디자인 산책’을 단행본으로 엮었던 거에요. 책으로 펴내려면 3년 치 정도의 사보가 모여야 하는데 필름들만 모아도 창고에 수북이 쌓이죠. 1993년12월에 책이 나왔는데, 그 달 내내 이 책만 본 것 같아요.  유난히 술 광고에 관한 글과 사진이 많아서, 보고 있자니 나중에는 정말 취한 기분이 들더군요.

김희라 교정 보러 기획사에 갈 때마다 다른 회사 사보들도 많이 접할 수 있었어요. 그 중 쌍용의 여의주와 제일기획의 사보라면 모두들 최고로 인정하곤 했어요. 그 때도 제일기획 사보는 광고라는 특수분야를 다루는 전문지면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박정희 우리 사보는 일반 기업체 사보와는 좀 다르잖아요. 일반 기업에선 사내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여러 소식을 다 담고 있지만, 제일기획 사보는 광고전문지의 성격이니까요. 그래서 일부 직원들에게 재미없다, 사보를 사보답게 만드는 게 좋지 않냐는 의견도 듣곤 했죠.

사회 처음부터 사외보를 지향해 만든 뜻을 이어가다 보니 그런 거 같아요.

박정희 초기의 제작 의도가 바뀌지 않고 이어진다는 건 어떤 점에서는 제 역할에 충실하다는 뜻이죠. 예전에는 광고에 대한 전문 서적들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 사보가 광고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참고서적이 되기도 했고요.

사회
오늘의 대담을 비롯해 400호 창간호 작업을 하면서 여러 선배님들과 사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보았는데요, 세대를 이어 뜻을 이어가는 유래 깊은 사보를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어깨가 으쓱해졌어요. 물론 그만큼 어깨가 더 무거워지기도 했고요. 앞으로도 모든 선배님들의 뜻을 이어 좋은 사보를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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