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너무 멀리 가버렸다. 우리 광고를 본 소비자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특히 일부 광고는 학생 영화제에 출품된 한 장면처럼 보였다.’
1997년 칸 광고제에서 열광적인 주목을 받았던‘밀러 타임(Miller Time)’캠페인. ‘밀러 타임에는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다’라는 테마로 3년 동안 150편이 넘는 TV광고와 인쇄물을 쏟아내고, 전 세계 광고제를 휩쓴 이 화려한 크리에이티브에 대해, 대행사였던 팰런(Fallon)은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이 캠페인은 참담한 실패였다고.
크리에이티브란 일을 다루다 보면 잘 풀릴 때가 있고, 답답할 때도 있다. 남들이 뭐라 하든 자신있는 순간이 있고 세상은 괜찮다 하는데도 모자람만 보이는 순간도 있다. 그런데 답답함이라던가 부족함, 쉽게 말해 슬럼프를 되게 앓는 동안에도, 소문만 나지 않았으면 몰래 지나갔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내가 실수했음을 고백하는 일은 언제나 뼈아프고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런데, 팰런은 자신들의 치부를 공개하는 일을 머뭇거리지 않았다. 돌아보기 싫은 일을 돌아보고, 그냥 넘어갈수 있는 일을 반성했다. 과거의 성공에 우쭐하지도, 갇혀있지도 않았다. “당신 틀렸소”라는 지적에 자존심으로 맞서기 전에,“ 그렇죠. 이번엔 제가 틀렸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작년, 팰런 런던은 칸 광고제에서 캐드버리 밀크초콜릿 ‘고릴라’편으로 또 한 번 그랑프리를 거머쥐었다. 그들을 성공시켰던 방법이 아닌, 전혀 다른 방법으로 전 세계 크리에이티브의 맨 앞에서, 가장 주목받는 대행사로서의 위치를 여전히 지키고 있다. 두꺼워진 껍데기를 벗고 또 벗어 언제나 말랑말랑한 크리에이티브를 지속시키는 일. 그 신화의 이유를 팰런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가장 중요한 원칙은 우리의 과거나 자존심이 아니라 소비자다. 소비자가 계속 달라지기 때문에 우리도 계속 달라지는 것. 그 뿐이다”노하우가 왜 없겠는가. 경험이 왜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소비자를 선택했고, 소비자들이 사랑할 새로움을 고민했다. 그리하여 캠페인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 지속 가능한 크리에이티브의 힘을 자기들의 것으로 가지게 된 것이다.
제대로 된 캠페인을 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성공의 공식이 주는 안정감에서 빠져 나와 또 다른 새로움을 선택하는 건 더 어렵다. 기댈 수 있는 것, 익숙한 것들을 버리고, 아무도 하지 않았던 일을 시도하는 건 언제나 쉽지 않다. 그러나 마음이 겸손하면, 지난 시절의 경험에 갇혀 마음이 좁아지지 않는다면, 우리 눈은 더 큰 것, 더 새로운 것, 낯선 것을 놓치지 않고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움을 시도할 용기도 꺼지지 않을 것이다. 크리에이티브의 씨앗은 겸손에서 태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