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두 | 영국법인 국장 bd.choe@cheil.com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빠질 수 없는 신 중의 하나가 술(정확하게는 와인)의 신인 디오니소스(Dionusus 또는 Dionysos)이다. 그는 음주의 신일 뿐만 아니라 의식적 광기(Ritual Madness)와 황홀감(Ecstasy)을 불어넣는 신으로서, 특히 음주(飮酒)와 관련해서는 바쿠스(Bacchus)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여러 통계를 놓고 볼 때, 영국은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바쿠스와 밀애(密愛) 중인 국가임을 알 수 있다.
밥 먹을 때 반주 한 잔은 기본!
2003년 영국 정부가 의뢰한 유럽연합(EU) 음주실태 조사 결과를 보면 영국인 은 다른 유럽인에 비해 술자리를 자주 갖지는 않지만, 한 번 마셨다 하면 취할 때까지 마시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성의 경우 하루 500㏄ 맥주 3~4잔, 여성은 2~3잔 섭취하는 것을 기준으로 이 수치의 두 배 이상을 마신 경우를 과음으로 규정 했을 때, 영국 남성의 40%와 여성의 22%가 평소 과음을 하고 있다고 한다.
더불어 여성의 알코올 소비량도 매년 증가 추세인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식사 때 포도주나 맥주 등을 곁들이는 형식으로 알코올을 섭취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밥 먹을 때 꼭 약주 한 잔 곁들이는 것을 생활화하고 있다고나 할까?
‘민텔(Mintel)’이라는 소비자 조사 기관의 보고서에 따르면 영국인들은 선술집 (Pub)에서 술 마시는 것을 가장 즐기며, 매 년 수십 억 파운드를 술값으로 지출하고 있는데 그 비용은 영국인들이 집 밖에서 레저에 사용하는 비용 중 거의 절반에 해당한다고 한다. 한편 영국인이 문화생활에 쓰는 비용은 음주 비용의 1/3에 불과하다고 하니 영국인들의 바쿠스에 대한 지독한 사랑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음주문화로 인한 부작용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고, 양이 있으면 음이 있듯이 이러한 음주문화는 영국사회에 많은 부작용을 가져오고 있다. 2005년 1월 영국 정부는 아래와 같은 강력한 음주 억제조치를 전격 발표했다(영국은 1차 대전 당시 군수공장 근로자들이 잦은 폭음으로 문제를 일으키자 11시 이후의 술집 영업을 금지하기
도 했다).
▲술집에서 시간을 정해 놓고 술을 싸게 파는‘`해피아워’금지
▲음주 관련 범죄로 세 번 이상 적발된 사람의 술집 출입을 금지하는‘` 삼진 아웃제’도입
▲18세 이하 미성년자에게 술을 팔다 적발된 술집에 대한 즉각적인 허가 취소
이런 조치의 직접적인 배경은 영국인들의 음주량 증가와 이로 인한 각종 사건사고의 증가로 언론 및 전문가들의 질책이 빗발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청소년과 여성층의 음주문제가 심각한데 <더 타임스>의 보도(2005년 12월 16일)에 의하면 영국의 16세 이하 청소년의 음주량이 10년 전에 비해 두 배 가량 증가했다고 한다. 지난 8년간 술 때문에 병원 신세를 진 14세 이하 영국 청소년은 무려 2만 3000명에 달하고 더불어 알코올 때문에 발생하는 사건?사고가 연간 120만 건이나 된다고 한다.
술로 인한 사망자 수도 수년간 급증세를 보이고 있는데 잉글랜드와 웨일스 지방의 알코올 관련 사망자 수는 1997년 4887명에서 2004년 6544명으로 34% 증가했고 음주 후 싸움으로 인한 부상, 과음 후유증 등으로 입원한 사람이 1999년 4만 1880명에서 2004년 4만 5849명으로 9.5%나 늘었다.
영국 여성들의 음주 문제도 만만치 않아서 <가디언>지의 보도(2008년 5월 2일)에 의하면 술에 취해 풍기문란을 일으킨 혐의로 검거된 여성의 수가 지난 5년간 50% 이상 늘었다고 한다. 영국 당국에 따르면, 2007년 경찰에 검거된 여성의 수는 5891명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2003~2004년 3847명이었던 것과 비교해볼 때 2044명(53.1%)이 늘어난 수치라고 한다.
술을 마시면 날씬해진다? - 드렁코렉시아
한 가지 주목할 만한 현상은 많은 영국 여성들이 단순히 기분을 즐겁게 하거나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수단으로서 술을 마실 뿐만 아니라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는 수단으로서도 음주를 즐긴다는 것이다. 가칭‘드렁코렉시아(drunkorexia)’라고 불리는 이 현상은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고자 젊은 여성들이 식사를 거르는 대신 과도한 음주를 통해 부족한 칼로리를 보충한다는 의미로 원래 미국 뉴욕에서 시작되었으나 점차 영국에도 하나의 문화로 옮겨지고 있다고 한다.
2008년 3월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 인터넷판에 따르면‘드렁코렉시아’는 엄밀한 의미의 의학용어는 아니지만, 영양 문제 전문가들이 과도한 음주와 거식증 등 섭식 장애간 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개념으로 이 현상은 주로 젊은 여성층, 특히 대학 재학 중에 술은 마셔야 하지만 멋진 몸매를 유지해야 했던 젊은 여성들 사이에 주로 나타나고 있다 한다.
그러나 술에 의존할수록 음식은 멀어지는 데 따른 부작용도 심각해서 다른 조사들에 따르면 폭식하는 사람들의 1/3 정도는 알코올이나 약물 남용에 시달리고 있으며, 알코올 중독 여성의 36% 또한 섭식 장애를 토로해 섭식 장애와 알코올 중독 간의 심상치 않은 상관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폭음을 줄이기 위한 기발한 아이디어들
2005년에 이어 2008년 6월 영국 정부는 다시 한 번 청소년 폭음 방지 정책을 발표했다. 영국 정부가 발표한 청소년 폭음 대책에 따르면 술집 등에 대한 단속과 처벌을 강화하는 것은 물론 가정에서부터 음주교육을 실시해 올바른 음주문화를 뿌리내리게 한다는 정부 방침이다.
정부는 우선 각 가정에 자녀의 음주 허용 나이, 적절한 음주량 등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할 예정이다. 또 모든 술집과 클럽은 21세보다 어려 보이는 청소년에게 술을 팔 땐 신분증을 요구해야 하며, 미성년자 음주관련 법을 두 차례 위반한 술집에 대해서는 허가를 취소하거나 벌금을 물릴 예정이다. 세 번 이상 위반 시 벌금을 물리던 현행 처벌 규정을 강화한 것. 이와 함께 18세 이하 청소년이 길거리 등 공공장소에서 끊임없이 술 마시는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할 방침이다.
정부의 이런 정책과는 별도로 폭음을 줄이기 위한 기발한 아이디어도 제시되고 있다. 2008년 3월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와인 병의 표준 사이즈를 줄이는 게 알코올 소비 및 이와 관련한 건강 문제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한다.
의학저널<BMJ>의 부편집장인 그로브스 박사는“부부가 와인을 곁들여 저녁 식사를 할 때 와인 한 잔씩을 마시고도 병에 남은 나머지를 모두 마셔버려야 한다는 유혹에 빠지곤 한다”며 와인의 도수가 강해지는 상황에서 와인이 통상 750㎖짜리로 나오는 데 대해 문제 제기를 했다. 그는 품질을 높이면서도 작은 병에 담긴, 합리적인 가격의 와인이 출시돼야 알코올 소비를 줄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 프랑스의 경우 레스토랑이나 카페에서 와인이 작은 물병이나 한 병 아닌 반 병의 형태로 제공되며 작은 점포들도 375㎖ 짜리를 판매하고 있다고 한다.
영국인의 맥주 선호 현상은 여전하지만 와인 소비가 전체 주류 가운데 차지하는 비중이 지난 1970년 10%에서 2005년에는 28.8%로 늘어났다. 영국 정부의 단속 및 처벌 강화 정책이 실제로 청소년과 여성층의 폭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술 자체를 즐기는 영국 가정과 이를 최대한 마케팅에 활용하는 업계가 얼마나 책임감을 갖고 대응할 것인지, 무엇보다도 해당 청소년과 여성층 스스로가 바쿠스의 달콤한 유혹을 얼마나 극복할 수 있을지가 좀 더 근본적인 열쇠일 것 같다.